연재 중 넘어섬 18화

어우 하기 싫어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by wordsfromulsan

하기 싫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다. 뭐 하나 하고 싶은 게 없다. 일도 식사도 일상도 뭐 하나 의지가 생기는 게 없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사회생활이라며 억지로 웃고 머릿속에서 단어를 찾는 일도 시간 맞춰 밥을 먹는 일도 너무 힘들다. 의지가 고갈됐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우울증의 증상과 진행 과정은 이렇다고 알고 있다. 먼저 도파민이 저하된다. 그러다 보니 자주 하거나 일상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부터 해낼 힘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나에겐 출근해서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되겠다. 단순히 하기 싫어서 안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삶이 어디 그런가. 꾸역꾸역 해내지만 그 과정에서 남들보다 두 배 세배는 지치게 된다. 이런 마음으로 퇴근하고 집으로 가니 거기서도 쉽게 해낼 수 있는 게 없어진다. 신체적인 비유는 아니지만 과도하게 운동을 한 채로 집에 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그 상태. 그런데 이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신체적으로 지친 게 아니다 보니 내가 왜 이런 걸 못하고 있나 라는 생각을 하며 자기 비하를 하게 된다. 스스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건 커녕 할 수 있는 게 사라지다 보니 나를 가꿀 수 없어진다. 먹고 씻고 움직이는 게 할 수 없으니 스스로를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면 마지막에 하나가 남게 된다. 그것조차 하기 싫어진다면 우울증으로 인한 사망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9월 말 즈음 병원에서 과흥분 증상이 있으니 우울증 약의 용량을 줄여야 할 것 같다는 처방을 받았다. 그게 문제였을까. 근 한 달간 회사에서 주는 압박과 스트레스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건 문제겠지. 스트레스 푸는 법을 점점 잊어가 감정의 배설이 원활하지 않다. 이 문제는 또 어떡하지. 가슴속 깊은 곳에 무언가 쌓여간다. 수많은 문제가 엉키고 엉켜 닻이 되어 내 마음 깊은 곳에 내려왔다. 이걸 무식하게 팔과 힘으로 꺼내려니 너무 무겁다. 기계로 끌어올려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내린 게 아니라 어떤 장비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누군가 언젠가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내려놓은 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닻을 내린 채. 연결된 쇠사슬은 끊고. 버려둔 것 같다. 이걸 꺼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나약한 소리일 것이다. 힘들어서 본가로 들어왔지 않은가. 그럼 밥은 엄마가 차려주니 난 먹기만 해도 된다. 출근을 해야 하니 씻어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안 씻는 사람은 없는데 이게 뭐 그리 힘든 일인가. 회사는 입사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포기하나. 다들 그런 얘기들 하지 않나. 더러워도 버티는 게 이기는 거고 누구나 사직서 하나쯤은 품속에 가지고 다니니까 그냥 해라.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엔 다 보상받을 거라고. 그리고 너는 지금 배가 부른 거다. 집도 본가에 있으니 챙겨주는 사람도 있고, 취업이 안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는 지금 프로젝트도 큰 규모로 진행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 않냐. 닥치고 해라.

봐라. 내 주변의 어둠을.
어디라도 좋다고 했지? 여기가 네가 도착한 곳, 여기가 네 낙원이다.
(악령들을 한 번에 참살하고 질을 안아준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도착한 곳, 그곳에 있는 건 또 다른 전장뿐이다.
돌아가. 여긴 나의 전장이다.
넌 너의 전장으로 가라.
-베르세르크, 나무위키 발췌-

안다. 나도 안다. 나아갈 곳이 무서워 뒤돌아서 혹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친 곳이 어떻게 내가 찾던 곳이겠나. 그런데 지금은... 쉽지 않다. 매번 도망치기만 했기에, 이번엔 이 언덕을 반드시 넘겠다고 다짐했건만, 또다시 너무 높아 보인다. 이 언덕을 이번엔 넘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실 꼭 넘어야 할까 싶기도 하다. 데미안의 그 유명한 구절처럼 알을 깨야 새로운 세상이 탄생할 텐데 이번엔 깰 수 있을까.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왔다. 디카프리오가 맡은 게토 펫이라는 주인공은 어딘가 찌질하고 어설픈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동시에 본인이 원인이 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는 윌라 퍼거슨은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언덕을 넘는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한다. 그러다 본인만의 용기가 충만해진 순간 과감하게 언덕의 끝에서 차를 멈추고 그걸 활용해 문제를 해결해 낸다. 언덕을 넘는 걸 넘어서 본인의 역량에 따라 언덕을 다룰 줄 알게 된다. 그 용기가 참 부럽던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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