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의 색상을 좌우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Gemini(Google AI)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에 기반한 답변일 것이다. 직관적인 듯 보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이겠지만 내겐 여전히 의미가 명확하지 않게 다가왔다. 나는 자존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꽤 오랫동안 있었을뿐더러 스스로를 보듬기보단 채찍질을 택했던 내겐 너무 추상적으로 다가왔다.
이 질문이 떠오른 이유는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건 오롯이 나 자신이 기준이 되면 될 텐데 남들의 인정이 필요했다.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한다는 것 또한 "나는 잘하는 게 없으니까."라는 이유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여겼다. 한 때 근자감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을 미디어는 희화화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심 부럽기도 했다. 자존감이나 자신감을 갖지 못했던 나는 그걸 찾기 위해 수많은 사고 과정을 거쳐 근거를 찾아야만 할 것 같았는데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면이 단단해 보였고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특히 미디어가 아닌 현실에서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질투하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일까 자존감과 자신감이 없으니 무엇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내 눈에 세상은 잿빛이었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제공되어 있지만 내 눈에는 어두운 렌즈가 씌어져 있었고 사랑, 꿈, 희망 같은 긍정적이고 밝은 것들 보단 염세, 절망, 무가치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들러리로 함께하고 있었다. 태생부터 그러진 않았을 테고 가정교육을 그렇게 받은 것도 아닌데 꽤 오랜 기억부터 나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돌아봐도 내가 무언갈 특출 나게 잘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성적도 항상 중위권이었고 운동은 못하는 편에 속했다. 그래서 주변에 이런 것들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고 혹여 그들과 비교될까 노심초사하기 바빴다. 특히 그 비교가 싫어 친구들과 하는 공놀이가 두려웠고 성적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순간은 마치 내가 발가 벗겨지는 것 같아 끔찍했다. 그래서 그런 주제가 이야기로 나오면 은근하게 빠지거나 숨기기 급급했다. 아마 이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무엇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비교는 내가 했던 것이고 그들은 그저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이번에 성적이 이렇게 나왔어." "나는 축구할 때 다른 친구들보다 슛을 잘해."와 같이 본인이 느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걸 기준 삼고 비교를 한 건 나 자신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오랫동안 했던 것도 있었고 거기서 더 멀리 보고 달렸다면 남들보다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10대 시절 오래 했던 수영은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오는 친구를 보며 포기했고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시작한 농구는 나보다 더 빨리 실력이 느는 친구들을 보며 도망쳤다. 사실 내 생각만 했다면 기초부터 탄탄히 쌓아가는 정도를 걷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남들은 전혀 하지 않았던 비교를 나만 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면의 나를 점점 더 작게 만들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드러내는 방법보단 숨기는 방법을 먼저 익힌 나에게 세상은 내 꿈을 펼치며 뛰어들어야 할 곳보다는 맹수가 가득한 정글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걸 돌이키기엔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쯤 누구보다 내가 먼저 나를 괄시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노력해 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넌 안될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는데?"와 같은 날카로운 말을 내게 겨누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이나 진로와 관련된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두루뭉술한 대답을 하거나 주제를 돌리기 바빴다. 실현 가능성과 상관없이 각자의 청사진을 그리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함과 동시에 헛된 꿈을 꾸며 세상을 모르는 이들이라고 속으로 비하하기도 했다. 자존감이 없는 것을 마치 세상이 가진 염세를 깨달은 것이라고 나 자신을 속여왔다. 그렇게 내 속은 곪아갔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나에게 칭찬보단 채찍질을 가했던 내게도 변곡점이 생겼다.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학원에 강사로 우연히 입사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은 아이들에게 꿈에 대하여 글을 쓰게 했어야 했다.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너무 어려웠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이렇다 할 꿈을 나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아이들도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이론적인 요소를 습득해도 결국 내가 이해가 안 되면 강의 중에 말이 꼬이기 십상이었는데 꿈이라는 주제는 입이나 떨어질까 싶었다. 심지어 수업 일주일 전부터 등원한 아이들한테 꿈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없다거나 모르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저 부모님이 의대와 같은 좋은 대학을 가라고 해서 공부한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고로 인해 마치 삶에 정해진 공식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었고 그들 또한 세상을 잿빛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순간 두려웠다. 내가 이 아이들과 같은 길을 걸어온 건 아니지만 나처럼 꿈 없이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걱정이 너무 커졌다. 적어도 나 같은 어른은 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해결은 쉽지 않았다. 뻔한 교과서적인 조언들로 말을 꾸며낼까 싶기도 했고 어차피 대학이 중요해진 시대에 왜 좋은 대학을 가서 연봉이 높은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꼰대 같은 말들로 채울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중학교도 가지 못한 아이들에게 이런 말들이 와닿을 리 없었다. 아이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생각의 확장을 위한 목적 또한 있을 텐데 거짓말과 세상이 정해놓은 답안지 안에 가둬놓기 싫었다. 그래서 며칠간의 고민 끝에 떠올린 것은 만약 확실한 꿈이 없는 아이들에겐 먼저 내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착한 것과 도덕적인 것들을 가르치긴 하지만 그건 사회적 규범 안에서 잘 작동하는 톱니바퀴 같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일 것이다. 아이들은 도화지에 착함과 도덕을 찾아 색칠하는 연습은 해봤겠지만 그 외에 행복, 현명함, 사려심과 같은 것들은 어떤 색인지 조차 구별하지 못했다. 잿빛이 아닌 다채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물감을 쥐어주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수업 당일엔 꿈이 없다는 아이들이 참 많았고 하고 싶은 게 확실해 얼른 글을 쓰고 싶다는 소수의 아이들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대로 아이들에게 꼭 직업만이 꿈이 아니라고 했다. 타인을 위해 넓은 아량을 갖춘 사람,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사람, 지혜가 가득해 현명한 사람처럼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면을 다지는 것 또한 꿈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처음엔 단순히 직업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에 다소 당황한 듯 보였지만 금세 각자 내면의 자신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본인의 미래를 위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내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수업을 잘 끝냈다는 보람도 있었지만 나 또한 내면에 대해서 돌아보게 된 것이다. 잘하는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작게 만들기만 했던 내가 지금 어떤 어른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그제야 숨어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숨기고 도망치기 위해 말을 아꼈던 것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타인의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공감하는 방법, 배려하는 방법, 따뜻하게 걱정하는 방법 등을 남들보단 잘 알게 되었다. 이걸 왜 몰랐는 지도 깨달았다.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나는 들여다보지 않은 채 여전히 타인들의 이야기 만을 들으며 세상의 기준에 나를 세우지 않고 외면했다는 것이었다. 이걸 깨닫고 보니 어두웠던 내 세상에도 가로등이 조금씩 켜지는 걸 느꼈다. 무엇도 해내지 못할 거라며 구석에 숨기기만 했던 나를 보듬어 줘야 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공감할 줄 안다면 그 뒤에 내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면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야 내면의 내가 숨지 않고 자신감을 내비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게 내면을 담금질하는 방법이었고 단단한 자존감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걸 깨닫는 데 참 오래도 걸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잊고 지내는 시간이 많다. 최근에도 이걸 잊고 세상의 시련에 힘들어할 때마다 나를 숨기려고 했다. 그래서 다시금 상기하고 또 한 번 생각을 정립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됐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세상을 잿빛으로 보게 된다. 꿈과 희망보단 절망과 염세를 더 열심히 찾게 된다. 하지만 이는 정말 세상이 그렇다기 보단 스스로가 자신을 외면하여 내면이 숨어버린 나머지 그의 눈에 세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가끔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시련을 던져주곤 한다. 없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우린 극복해 내야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단단하지 않으면 나처럼 도망치고 무너지기 바쁠 것이다. 나처럼 내면의 자신이 구석에 숨어 눈을 감고 있거나 어두운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바라보고 그걸 벗기는 게 너무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가혹한 기준을 갖다 대고 담금질이 아닌 채찍질로 상처주기 전에 한 번쯤은 거울을 비춰보며 나와의 대화를 먼저 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