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스타터가 아주 천천히 그려낼 지도
자존감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앞선 글에서 나는 어린 시절 항상 뭔가를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걸 숨기기에 급급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왜 숨기는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소 납득하기 힘들었다. 과정 사이사이에 맹점이 심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어린아이니까 그랬다고 했을 순 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더 숨기고 싶어 했다. 사실 순서가 맞나 싶기도 하다. 나는 못해냈기에 숨겼던 걸까? 아니면 못해낼 걸 알아서 미리 숨겼던 걸까?
실은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나는 못해낼 거라고 생각했기에, 남들에 비해 한참은 부족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걸 알았기에 미리 숨기려고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남들에 비해 배움이 느린 사람이다.
정말 그렇다. 나는 뭐 하나 빨리 배운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집중력의 문제인지 아니면 사고방식이 남들과 다른 지는 몰라도 무언가를 체득하는 데 있어 꽤 느린 편이다. 축구를 예로 들자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차는 법을 익히게 된 것도 고등학생이 됐을 때였다. 학교에 가기 전부터 공과 가깝게 지냈음에도 항상 내가 찬 공은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승부욕이 강한 아이들은 내게 조금은 다른 의미의 감탄을 보였고 그들의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주눅 들었다. 컴퓨터 게임도 그렇다. 약간의 손가락 움직임으로 수행하는 간단한 것조차 나는 잘하지 못했다. 머리는 대충 이해한 것 같았지만 명령을 수행하는 내 몸은 그 신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 하는 게임은 진도가 안 나가서 내게 화가 났고 함께하는 게임은 그것대로 1인분을 해내지 못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다. 보조바퀴가 없는 자전거도 성인이 되어서야 겨우 익혔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과정에서 나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생겼다. 함께 축구를 하자고 하면 내가 함께하는 이들에게 폐를 끼칠 것만 같았고 그 과정에서 아쉬운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는 생각에 선뜻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어릴수록 승부욕은 강한데 반해 이타심은 다소 약했던 아이들이 많았고 그런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듣는 것은 내게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앉아서 이야기를 하거나 동네 놀이터에 있는 간단한 기구와 함께 소소하게 노는 게 좋았다. 그런데 남자아이들이 그런 걸로 만족할리가 있나. 나 또한 사회적인 동물이고 그들의 무리에 함께하고 싶었으며 그러려면 축구가 됐건 게임이 됐건 협동하는 놀이에 동참해야 했다. 하지만 참여만으로도 내 긴장도는 매우 높아졌고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못하는 데 실수가 더욱 잦아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주제로 이야기가 나오거나 함께 하자고 하면 난 분명 또 저 아이들을 실망시킬 것이라는 피해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10대 시절 동안 이런 수많은 상황에서 애써 괜찮은 척하며 나를 숨기려고 하기도 했고, 피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대외적으로 얘기했던 승부욕이 없었다는 변명은 거짓말이었다.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잘하고 싶었고 칭찬이나 환호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엔 체육 선생님이 가르쳐 준 농구의 슛 자세를 혼자서 하루 종일 연습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농구를 잘하게 될 순 없었다. 드리블부터 레이업, 리바운드 등 정말 복합적인 것들을 잘해야 하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이거 하나라도 잘하고 싶었다. 또 고등학교 시절엔 조를 짜서 합동 줄넘기를 하는 것이 수행 평가였는데 나는 그때 기본적인 줄넘기 자세도 겨우 해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성적에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같은 조의 친구 한 명을 붙잡고 새벽부터 연습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력들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내 기준에서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좌절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잿빛의 렌즈가 더욱 짙어졌다.
한편 슬로우 스타터(Slow Starter)라는 스포츠 용어가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시즌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을 발휘하여 좋은 성적을 내는 사람이나 팀을 의미한다. 나는 이 단어가 초반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후반에 좋은 성적을 냈어도 초반에 받은 낮은 성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커가면서 알았다. 나 또한 슬로우 스타터였다. 농구를 한창 하던 시절 나는 위치 선정을 할 줄 몰라서, 리바운드를 못해내서, 몸싸움에 밀려서 항상 좌절하고 주눅 들었지만 사실 수비가 허술한 순간에 슛 하나는 곧잘 해내곤 했다. 중학교 시절 죽어라 했던 슛 연습이 아주 천천히 미세하게 내 몸에 스며들었던 것이었다. 또 드럼을 배웠던 적 있었는데 그때도 처음엔 팔과 다리가 따로 노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두 개에서 세 개 정도의 리듬은 익히고 싶었고 다행히 친구들은 내가 드럼을 배운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에 비교 대상이 없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했었다. 그리고 이건 고등학교 시절에 독특했던 음악 선생님이 내주신 밴드 수행평가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드럼을 배울 땐 빨리 늘지 않고 성과를 내지 못해 좌절했는데 이 또한 나 조차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스멀스멀 내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남들은 봤을 땐 어떨지 몰라도 내 기준으로는 후반부에 좋은 성적을 냈던 것이다. 이걸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때부터 나만 아는 주문을 만들었다.
"지금은 못하지만 반드시 해낸다. 나는 시작이 느릴 뿐이지 언젠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주문이 내 잿빛 세상에 희미한 빛을 밝혀주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나부터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자신이 없으니 항상 주눅 들고 긴장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느려도 언젠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단 내가 나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시작이 느리니 처음에 남들이 내게 아쉬운 표현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당장 이걸 고칠 순 없을 거라고, 대신 끝에 닿았을 땐 분명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분명 후반전에 더 강할 거라고 계속 되뇌었다. 사실 이런 믿음이 나를 배신할 때도 분명히 있다. 결국 아쉬운 결과를 낼 때도 있었고 함께하는 이들을 실망시키도 했다. 그럴 땐 어릴 적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좌절하고 숨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주변을 한 번 돌아보면 내게 실망한 이들은 그 분야에서 잘했을 뿐이었다. 그들도 못해내는 게 분명히 있고 거기서 내가 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모든 걸 잘할 수 있을까. 그저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고 그 길은 오직 내 눈에만 보이기에 그렇게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는 오직 빠른 것만이 중요해서 자신의 지도에 지름길만을 그려 넣기도 한다. 이 방식이 잘못된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과는 다르다. 내 지도는 늦게 완성될지언정 남들보다 세세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이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내 비루했던 자존감에도 조금씩 살이 붙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배워야 할 건 많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남들에 비해 빨리 터득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도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면 부담스럽고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해서 두려운데 이 나라는 그 탐험을 빨리 해내라고 재촉해서 더 초조하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 나보다 앞서 걸어가는 이들도 분명 보이지만 그들이 오직 지름길만 그려놓은 것보단 내 지도가 훨씬 자세하고 다양할 것이다. 경쟁 사회라며 어떻게든 남들보다 잘나고 빨라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그런 풍토에 잠식되면 아마 나는 또다시 무릎 꿇고 잿빛 세상 구석에 숨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경 쓰지 말자. 비록 걸음이 느린 아이지만 이 아이가 그릴 지도는 거미줄같이 촘촘할 거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걷자. 이 믿음이야 말로 내 세상을 환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