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넘어섬 05화

오타쿠

오타쿠라서 다행이었던 내 삶의 한 페이지

by wordsfromulsan

그렇듯이 기억 속의 내 과거는 밝지 않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내가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를 작게 만들고 스스로를 숨겨서 외로울 때마다 나를 위로해 준 건 음악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훨씬 음악에 몰입했고 들으면서 울기도 했다. 내가 우울하고 외로울 때마다 위로해 준 건 음악이었다.

처음 내가 음악에 과몰입할 수 있게 해 준 이들은 에픽하이였다. "Fly"라는 곡을 냈을 때 그들의 팬이 되었고 4집 [Remapping The Human Soul]로 힙합 음악의 팬이 되었다. 특히 해당 앨범의 수록곡인 "Still Life"는 굉장히 많은 아티스트가 참여해 듣는 이를 위로해 주는 곡이었다. 힘들 때면 그 곡을 들었고 곡의 주인인 에픽하이뿐만 아니라 함께 참여한 아티스트들에게 관심이 생기게도 해주었다. 그렇게 알게 된 더콰이엇의 3집 [The Real Me] 또한 내 등굣길을 위로해 주는 앨범이 되었다. 그들은 항상 힘든 나를 위로해 주고 감동을 주는 우상이었다. 특히 타블로의 가사는 마치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위로해 주고 보듬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가사처럼 생각하면 나도 언젠간 행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맞이할 것만 같았다.


내 꿈은 하늘을 걷는 난쟁이의 꿈
무지개를 손에 거머쥔 장님의 꿈
달콤한 자장가에 잠이든 고아의 꿈
시간을 뒤로 되돌린 불효자의 꿈
내 꿈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꿈
내 꿈은 크게 노래 부르는 벙어리의 꿈
내 꿈은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속삭임에
미소를 짓는 귀머거리의 꿈 Dream

가질 수 없는 꿈이지만, I have a dream
비틀거리는 꿈이지만, I have a dream
버림받은 꿈이지만, I have a dream
Live and die for this dream
-Epik High - 낙화 (Tablo's Word)

한숨을 또 몰아 쉬는가? 심장이 좁아지는가?
세상의 모든 눈물이 또 볼에 쏟아지는가?
폭풍이 몰아치니까 어리석게 소나기조차
놓칠까 봐 두려워 주먹을 또다시 꽉 쥐는가?
누가 믿을까, 당신도 순수했었는데
잘못된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는데
죽고파 말하겠지, "세상아 두고 봐"
"널 꺾지 못한다면 작은 상처라도 주고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아무것도 빼앗길 게 없어서
견딜 수가 없다면 모래시계를 깨
조각난 시간을 손에 담아 시대를 베
-Epik High - Still Life feat Jinbo, The Quiett, TBNY, Kebee & MC Meta

멈춤 버튼 없는 인생의 경주 속에서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나의 청춘
난 떠나 그 누군가 날 패배자라 불러도
세상의 나를 저 넓은 땅으로 흘려줘

내 운명은 스스로 짊어지고 갈 테니
날 괜히 막으려 하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의 외침 이제 하늘이 닿겠지
저기 달빛을 향한 힘찬 날갯짓

내 인생 두려움 따윈 없다네
한 치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열망해 왔지
영화처럼 살 수 없더라도 좋다
또 모든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더라도 좋다
나 이제 후회 없이 살고파
모든 게 끝나는 순간 미소 지으며 떠나고파
한 번뿐인 인생 이렇게 살 수 없어
바람처럼 왔다 이슬처럼 갈 수 없어
-The Quiett - 한 번뿐인 인생

그러나 이 또한 내 맘처럼 되지는 않았다. 이제는 많이 잊혔을 수 있지만 타블로에겐 일명 "타진요" 사건이 있었다. 내게 항상 희망을 주고 나를 보듬어 줬던 이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제 막 결혼하고 딸이 생긴 그는 전 국민에게 억울한 돌팔매를 맞아야 했고 방송은커녕 음악도 못하고 숨어버렸다. 너무 무서웠다. 그가 나와는 다르길 바랐다. 나는 조금만 힘들어도 숨고 주변에 희망을 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반대였던 그가 우러러 보였던 거였고 그 모습만 계속 보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그도 숨어버렸다. 물론 해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그는 그렇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슬펐다. 너무 슬펐다. 규모와 정도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세상에서 숨고 싶은 그 마음만은 너무 이해되는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적어도 그때는 내가 구매한 위로의 출처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잔인했던 나는 그가 이것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이겨내는 히어로이길 바랐다.

그 사건 이후로 그의 가사는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 복귀를 알린 그의 첫 솔로 앨범 [열꽃]은 우울함의 극에 달하고 있었다. 또 희망을 주던 그의 가사는 염세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기한 "낙화"와 그 곡의 후속으로 발매된 "개화"를 비교해 보면 그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

My child, when you follow
내가 밟은 길을 잘 봐둬
언젠가는 너의 옆에 걷지 못할 거야
여기 발자국을 남겨둬 보고 피해
편한 길을 택한 사람들을 따라가렴 그게 답이기에
물음표처럼 구부러진 내 길은
그저 무수한 문제만 낳기에
나를 보고 꿈꾸는
너의 그 꿈은 깨고 보니 악몽이 아니길
끝까지 달려와 보니
내가 찾던 영원, 치유, 답을 닮은 건 not a thing
이 길은 내가 달리던 이유였던 가족도 앗아가 버렸어
어쩌면 출발을 알리던 총성은 내 등을 향한 거였어
잘 들어 온 세상이 너를 환영해도
그 세상이 너를 버릴 테니 gotta let go
늦기 전에 'cause I've been there before
눈에 보이는 건 화려해도
Don't be fooled by the diamonds and gold
갈채 쏟아질 때 취하지 마
때론 칭찬으로 너의 발을 묶을 거야
레드카펫 깔아줘도 잊지 마라
그게 너의 피땀으로 붉게 물든 거야

...

너의 꿈은 키가 닿는 꿈이길
쥘 수 있는 것만 보여주는 꿈이길
주는 만큼 뺏는 것이 성공이니까
너무 소중한 건 주지 않는 꿈이길
너의 꿈은 시선 끌지 않는 꿈이길
비밀처럼 지켜, 항상 숨을 죽이길
주는 만큼 뺏는 곳이 세상이니까
너무 꿈만 같은 건 주지 않는 꿈이길
-Epik High - 개화 feat 김종완 of NELL

"낙화" 이후 9년 만에 발매된 "개화"는 이전 곡과 너무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외쳤던 희망이나 꿈은 사라졌거나 굉장히 작은 것이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희망찬 미래를 그리려는 노력이 사라졌다는 게 제일 충격적이었다. 그는 다시 음악을 하고 방송에 나왔지만 배신감과 분노가 가득 차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한 내가 느끼는 우울감을 그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물론 새로운 음악 또한 뛰어난 음악성을 갖추고 있기에 들으며 감탄하긴 했지만 한동안 그들의 음악을 듣지 못했다. 이전엔 내 내면의 우울이 언젠간 사라지고 밝은 미래가 다가올 거라는 마음으로 들었다면 사건 이후의 음악을 들을 땐 마치 내 우울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소 불편했기 때문이다. 아예 같은 상황은 아닐지언정 내가 아픈 만큼 그도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는 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모든 선을 가로채.
반듯함을 강요해.
직선이 되라고 휘어진 자로 재.
달리라고 해.
사방이 벽인데.
벽돌을 얹이면서 등을 떠미네.
넌 별인데.
어른들의 헛된 소원 때문에 별똥별이 돼.
너에게 삽을 건네준 손이 손가락질해.
스스로 무덤 판 거래.
- Tablo - 밀물 Scratch by DJ Friz

내게 행복할 자격 있을까?
난 왜 얕은 상처 속에도 깊이 빠져있을까?
사는 건 누구에게나 화살 세례지만
나만 왜 마음에 달라붙은 과녁이 클까?
감정이 극과 극 달리고
걸음 느린 난 뒤떨어져 숨 막히고
내 맘을 못 쥐어 세상을 놓쳐
몇 걸음 위 행복인데 스스로 한 단씩 계단을 높여
누구에겐 두려운 일
하지만 내겐 웃음보다 자연스러운 일
사람이 운다는 것은 참을수록
길게 내뱉게만 되는 그저 그런 숨 같은 일
Let me breathe
슬픔이 내 집이잖아 머물래 난 제자리에
잠시 행복 속으로 외출해도 반드시
귀가할 마음인 걸 이젠 알기에
-Tablo - 집 feat 이소라

그래서 한동안은 그들의 음악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즐거우려고 들었던 음악이 힘든 일이 되지 않아야 했다. 무엇보다 감정소모가 너무 심해서 설사 에픽하이의 음악을 들어도 [열꽃]이라는 앨범은 쉽사리 듣지 못했다. 그렇게 내 마음속 영웅들의 이미지는 풍화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도 참 많은 일을 겪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패배하며 무릎 꿇기도 했다. 그건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뭐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나도 군생활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특히 내가 싫어하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잠까지 같이 자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생활관에 나 혼자 남아 티브이를 보는데 자우림의 김윤아가 나와서 "키리에"라는 곡을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방송에 나오는 곡들이라면 우울과 염세는 희망을 노래하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걸 직접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비유는 가능한 줄인 채 최대한 직설적으로 우울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걸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의 가사에 위로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쉴 새 없이 가슴을 내리치는 이 고통은
어째서 나를 죽일 수 없나

차라리 지금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울어도 울어도 네가 돌아올 수 없다면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꿈이야
불러도 불러도 너는 돌아올 수가 없네
나는 지옥에, 나는 지옥에 있나 봐
-김윤아 - 키리에
*키리에 :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이라는 말로 쓰이는 기도교 용어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아 우울한 감정에 무조건 '잘 될 거야.'라는 말로 위로하는 것보다 같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위로하는 일에 억지로 말을 꾸며내는 것보단 진심으로 다가가는 게 훨씬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는 것을. 그 이후 [열꽃]을 다시 들어보니 감정이 다르게 다가왔다. 심지어 사건 이전 희망을 외쳤던 때 보다 더욱 강하고 단단한 앨범처럼 느껴졌다. 그는 당연히 희망을 외칠 수도 있지만 그걸 넘어서 다른 힘든 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연대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는 걸 알려줬다. 그리고 그것이 희망을 외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위로하기 위해 말을 꾸며내고 뻔한 말들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그들의 우울에 함께 위치하기 위해선 그 깊은 바다에 뛰어들 용기가 있어야 했다.

내 삶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굉장히 크다. 비록 내 직업이 음악을 하거나 관련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음악은 내 마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한 번은 기록하고 싶었다. 단순히 감정의 교감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키를 잡아주기도 했다. 앞서 쓴 깨달음이 그러하다. 덕분에 이젠 누군가의 힘든 일을 들어줄 땐 이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만족할까라는 고민보단 이 사람의 마음이 어디까지 가라앉아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지 않은가. 어쩌면 음악에 불필요할 정도로 과몰입한 오타쿠일 수 있지만 이 과정 속에서 난 분명히 한 단계 성장했다고 생각하기에 한 번은 꼭 기록하고 싶었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4화고해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