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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Oct 10. 2019

딸은 당연하고 아들은 기특하고

'남녀 역할에 대한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집착'


엄마가 고관절 골절 수술을 하고 열흘 넘게 입원 중이다. 휴가를 내고 엄마 곁을 지키고 있다. 당연히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 딸 없어요? 왜 아들이 와 있어요?"


입원 첫날 앞자리 환자분이 우리에게 처음 건넨 말이다. 엄마에게도 딸이 있다. 하지만 누나는 집을 비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집... 이 멀어서 나중에 올 거예요."


처음 보는 분에게 멋쩍은 미소로 답했다. 4인 병실. 환자를 포함해 일곱 명의 여자와 청일점인 나와의 거가 시작됐. 이틀의 공휴일과 샌드위치 연휴에 5일 휴가를 붙여서 열흘간 엄마와 함께 생활했다. 고관절 골절 수술로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 소변통을 비우고 관장을 하고, 휠체어를 밀고, 식사를 챙기면서 고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병실에 있는 모두가 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뜬금없는 아들 칭찬 릴레이가 시작됐다.


"나도 아들 있지만 참 부럽네."

"우리 아들은 엄청 짜증 냈을 텐데. 착하네."

"딸 같은 아들이네."

"주변에서 효자라고 칭찬 많이 죠?"

"저 집은 아들이 살림 밑천이네."


병실 아주머니들과 말을 트고 가까워지자 낯 뜨거운 말들이 쏟아졌다.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다. 같은 병실에는 20대 초반 딸이 나보다 오랜 기간 엄마를 돌봤다. 옆 자리에는 퇴근하는 딸들이 매일 교대하며 한 달 넘게 엄마를 챙겼다. 어떤 분은 매일 허리 수술한 엄마 기저귀를 갈면서도 온화한 얼굴이었다.


엄마들에게 딸들의 수발은 당연했다. 며칠  머문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공을 모조리 가로챈 기분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카톡과 전화로 엄마를 챙기는 누나도, 독박 육아를 하면서 시어머니 드실 음식 만들어 나르는 아내의 공도 모두 내가 가로챈 것 같았다. 칭찬 싫어하는 사람 없겠지만, 마땅한 칭찬은 아니었다. 민망하고 불편했다.


엄마 뒷머리가 눌려 빗으로 빚었더니 옆에서 '효자'라고 했고, 엄마 휠체어를 미는 내게 착한 아들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효녀'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대부분 딸이 부모님 병간호를 하는데도 말이다. 남녀 역할에 대한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집착이었다.


남녀평등의 시대. 남녀 역할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젊은 부부들은 육아와 살림, 사회생활을 공평하게 나눠 역할 분담을 한다. 한 친척은 쌍둥이를 출산하고 아빠가 육아휴직을 다. 시대가 바뀌었고 이러한 변화에 남자들도 크게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만큼 빠르게 의식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어르신들 마음이 문제다. 나라도 진화하고 싶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똑같이 하시는데요. 뭐. 엄마니까 하는 거죠. 어머님 따님이 제일 어린데 저보다 오래 있었잖아요. 훨씬 더 기특하죠."


아무도 내 말에 크게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라서,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자식이니까, 당연하니까 하는 일이라는 말에는 옅은 미소로 답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아들 딸 누가 하는 효도가 아닌 그 행동 자체 가치를 받아들인다면 괜한 차별로 인한 효의 가치 하락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님들에게 받은 칭찬을 나보다 훨씬 기특한 세상의 모든 딸에게 되돌려주고 싶. 딸과 아들, 효도 질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효도는 부모님께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를 실천하는 과정이. 어느 자식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난데없는 폭풍 칭찬을 받으니, 연예인 병이 생겼다. 괜한 고집부리는 엄마한테 짜증을 내려다가도 표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주변 어머님들의 흐뭇한 표정을 떠올리며 수시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우리 아들 짜증 안 내요."


엄마의 천재적인 거짓말 나를 한없이 착하게 만들어 버렸다.


"엄마! 아들 본성 들키기 전에 빨리 쾌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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