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상사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상사가 무슨 질문이라도 하면, 예컨대 그 답을 5 만큼밖에 몰라도 10을 아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오버하기도 합니다. 업무에서뿐만 아니라 회식 자리에서도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주량을 속이기도 한다는 설문 결과(요건, 제 얘기네요)도 있지요.
(사족. 어이없는 설문 조사 같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저보다 술을 못 마시는 인간이 없어 무척 당황했습니다. 얼굴은 늘 터질 것 같이 빨개지지만, 못 마시지는 않는 척 넙죽넙죽 다 받아먹고 게워내기 일쑤였죠. 그때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때 생긴 식도염을 평생 달고 살거든요)
제가 대기업서 아르바이트생을 거쳐 계약직으로 일할 때 일입니다. 팀에 경력직 A 대리가 새로 들어왔어요. 대기업 경력이 7년이 넘는 데다 말솜씨도 좋고, 성격도 싹싹해서 면접관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넉살도 좋아 아침에 출근하면 친분도 없는 팀원 모두에게 '좋은 아침입니다. 활기찬 하루 보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어요. 친화력 갑인 성격이고 말도 잘해 오래전부터 한 팀이었던 것처럼 팀원들과도 금세 잘 어울렸습니다.
팀장뿐 아니라 팀원들도 여러모로 A 대리에게 거는 기대가 컸어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A 대리를 포함해 담당자 세 명이 전사에서 진행하는 한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가장 큰 불만은 A 대리가 '입으로만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업무 이해도도 떨어지고, 외장하드에서 전 회사에서 일했던 자료만 꺼내서 의존하며 횡설수설 업무를 처리한다고 말이죠.
팀장은 두 달은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팀원들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팀장도 A 대리를 못마땅해했습니다. 업무에 관해 질문하면 늘 그럴듯하게 대답만 잘하는 그에게 팀장이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결론만 좀 빨리 말해요. 그래서 했다는 겁니까, 안 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부르면 다이어리라도 좀 들고 와요. 얘기 듣다가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팀장의 쓴소리 빈도가 잦아졌어요. 심지어 품의서도 제대로 작성할 줄 모른다면서 팀장은 후배의 품의서를 던져주고 그대로 베껴 쓰라고까지 했습니다. 팀원들 모두가 민망해하는 상황, 그에게 실망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었습니다.
팀장을 비롯해 동료들이 A 대리에게 크게 실망한 이유는 프로젝트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기본기가 부족한 데서 오는 절망감 때문이었습니다. 신입이면 처음부터 가르치기라도 할 텐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한 상황이었죠.
아르바이트 첫날의 수치스러움을 떠올리며 모르는 것, 헷갈리는 것은 주위 사람에게 수시로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처음이니까 잘 모를 수도 있지 뭐'라는 제 생각과 달리 선배들이 여기는 기본기 습득 유예기간은 상당히 짧았습니다. 두 명의 선배에게 연타로 "지난번에 알려준 거 아니야?"라는 퉁명스러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A 대리나 예전의 저처럼 작은 일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인상을 주면 선배는 구박하고, 상사와 동료들은 실망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발전해야 하는데, 오히려 몇 번이나 알려준 일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면 앞날에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우는 걸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A 대리는 언변이 훌륭하여 이직에 성공하였지만, 상사와 업무를 대하는 태도, 문서 작성 능력, 7년의 경력 및 실력 관리 등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 부족해 이 팀 저 팀 옮겨 다니다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떠났습니다. 직장생활에서 기본기를 갖추지 못하면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선배나 상사들이 자주 내뱉는 '기본기가 안 돼 있어!'라는 말을 그저 기분 나쁘게만 흘려들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사회생활 초기에 기본기를 놓치면 향후 자신에게 몰려 올 후폭풍이 상상 이상으로 거세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