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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Feb 02. 2019

사랑이란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만났을 때, 그녀가 바구니에 담겨져 물에 떠내려 오다 그에게 닿은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사랑이라는 게 뭘까?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선생님 자체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내 감정 자체를 사랑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학처럼 고고하고 금처럼 빛나는 존재이기에 학금(鶴金)이라는 별칭을 만들어 불렀다.


매일 시를 쓰고, 일기를 쓰며, 그리워했다. 사비나가 프란츠의 삶에 각인시킨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처럼 학금의 이상적인 모습이 내 심장에 각인되었다. 사랑의 감정은 시적 언어로 승화되어 커나갔다. 나의 가슴 앓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한다. 오로지 테레자 만이 중요했으면서도 다른 여자들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토마시.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애쓰는 테레자, 여자를 플라토닉 개념으로 바라보고 정조를 중시하는 프란츠. 정조가 아닌 배신에 매력을 느끼는 사비나. 테레자의 강아지 카레린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 


내가 바라는 게 뭔지 몰랐다. 그냥 학금만 생각하면 힘든 일도 잊었다. 학금이라는 이상적인 방향성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사랑이라지만 아무것도 바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바라만 볼 수 있어도 벅찼다. 테레자가 카레린에게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았듯이 학금의 존재 자체만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짝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상대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영원히 사랑받을 수 없는 게 명확하니까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사랑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사랑은 Es muss sein을 초월하는 것이다.


Es muss sein은 명령이기도 하고 운명의 목소리를 의미한다. 우연이나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욕구에 따라 토마시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여자 사냥을 하는 것이 Es muss sein이다. 그는 이 공격적이고 장중하고 엄격한 Es muss sein에 짜증이 났고,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짝사랑은 자유였다. 학금은 내 마음을 몰랐고 나는 스쳐 지나가는 학생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내가 지켜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원하는 대로 상상을 펼치면 그만이었다. Es muss sein을 초월하는 자유가 사랑이라지만 가볍지 않았다. 늘 마음 졸이며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봐 긴장했다. 항상 밝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무거움이 나를 눌렀다. 

베토벤 - 현악4중주 16번 / 하겐4중주단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네 범주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네 번째 범주에 속하는 프란츠는 테레자를, 토마시의 아들은 토마시의 시선을 받고 싶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받고 싶고 사랑에 목말라 한다. 나는 학금의 시선을 원했다. 내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더라도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역사적인 날로 기록했다. 그에게는 잠시 머문 의미 없는 시선이었지만 나에겐 축복이었다. 짧은 시선이 모여 언젠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토마시의 아들이 토마시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답장을 요구하지 않았듯이,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밤마다 썼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사비나의 키치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버지가 군림하는 평화롭고 부드럽고 조화로운 가정의 모습이다. 그녀는 키치를 인정하지 않고 적이라 단언했다. 그럼에도 존재 깊은 곳에서 부정하고 했던 키치를 품고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키치가 미학적으로 존재하는 이상처럼 남기보다는 우리 삶에 스며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사비나는 그림 앞면이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뒷면은 이해할 수 없는 진리라고 했다. 키치가 그림의 앞면이고 비-키치가 뒷면이 아닐까?


나의 키치는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짝사랑은 내 감정을 사랑한 환상에 불과했다. 학금은 나를 이끌어 주는 북극성 같은 존재였지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인간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다. 


사랑은 상호 간에 느끼는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 감정이 흐르기 보다는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옆에 서 있어야 한다. 상대가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면 덜어 주고, 가벼움을 느끼면 짐을 나눠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균형을 유지해 나가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


미치도록 그리운 그대


어제까지만 그리워하고

오늘은 나의 삶을 살자.

바랄 수 없는 만인의 연인, 그대


그대가 나를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

내가 그대 주변에 맴돌아도 되는 것만으로


난 단지 그대의 수호천사

늘 그대 곁에 머물면서

그대가 잘되길 

그대가 행복하길 

그대가 건강하길 

그대가 꿈을 이루길 바라는 여린 소녀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걸까?

그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더 사랑하는 걸까?

그대가 있는 세상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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