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야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말들이 정말 많지만, 졸업을 앞둔 나를 소개하는 말은 ‘00대학교 00학과에 재학중인 누구입니다’가 전부였었다.
청소년기 이후 나는 내가 어디 소속된 사람인지로 쉽게 나를 설명하고 나 역시도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였었다. 그랬던 나에게 졸업은 무소속을 의미했고, 안전한 나의 바운더리가 사라지는 공포와도 같았다.
무소속. 앞으로의 5년동안 나를 잔인하게 괴롭혔던 공포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돌파구는 한예종 입시 도전이었다. 누구나 알아주는 대단한 학교에 입학한다면, 그 소속을 갖게 된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 인생의 행운은 계속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행운도 최소한의 노력과 실력이 있어야 덧붙여지는 것일텐데, 그때의 나는 그 당연한 진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당연한 입시에서의 탈락. 그러나 나는 조금 의기양양해있었다. 제대로 준비만 한다면, 그 문턱을 넘는건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완벽하게 돈을 모아서, 제대로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돈을 모으자’ 그때 나의 머릿속에 경구처럼 새겨진 문장이었다.
일단 취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돈을 주는 곳이라면 아무데나 상관 없었다. 나는 어차피 예술가가 될 사람이니까. 그곳은 스쳐지나갈 곳이니까.
사회의 문턱 앞에 선 나는 노력의 가치를 잃어버린, 결국 노력하는 법을 잃어버린 비겁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무리 취업난이라고해도, 아무데나 입사를 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회사의 간판 대신 진정한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며, 강남의 작은 사무실에 내 책상을 갖게 되었다.
회사에서 내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왜 그 학교 나와서 여기서 일해?”
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어떤 면에서는 아직 성과로 나를 증명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증명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갈때마다 나는 자괴감이라는 늪에 빠져갔다.
사람들이 이름도 잘 모르는 곳, 그 안에서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일을 맡는 나. 나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 동료들. 아직 사회의 구성원이 될 준비가 안 된 나는 매일 같이 강남역에 눈물을 흩뿌리며 티슈처럼 하루하루를 뽑아서 버리고 있었다.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늘 이질감을 느꼈고, 그 감각은 하나의 생각으로 수렴해나갔다.
”나는 예술을 할 사람인데“
가뭄을 겪어낸 마른 장작처럼, 그 생각은 겉잡을수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행동이었다. 나는 새로운 공부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명분으로 정규직 제안을 거절했다. 첫 번째 퇴사였다.
그 때의 나의 머릿속에는 ‘연극’이라는 단 한가지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전쟁에 파견갔던 애인을 다시 만난 기분이 이랬을까. 내 온 하루는 연극작업으로 가득했었다. 팀을 꾸리고 연극 연습을 하고. 의상을 고르고 조명을 달고. 무대를 만들고, 나의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닿는 극도의 절정감을 맛봤다.
내가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 절정이 존재한다는 이유였다. 후작업이 있는 영화와 달리, 연극은 가장 찬란한 순간이 공연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 때문에 몇 개월간의 고생을 단번에 잊고 찬란함만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찬란함을 위해 많은 것을 지불해야한다는 것을. 공연이 끝난 나에게는 냉정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이상 학생이 아닌 나에게 세상은 ‘무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연극인이 되어보거나, 사회인이 되는 것이었다. 한 번 눈을 감은 사람에게 두 번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준비를 해서, 그때는 제대로 연극을 해야지”
전공을 살려 서울에 있는 한 공공기관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세련된 건물, 좋은 동료. 그리고 업무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던 나. 그러나 이번에는 불운이 내 인생을 방문했다. 정부 정책의 갑작스러운 변화. 팀의 해체, 갑작스러운 퇴사처리. 학생, 직장인, 무직자를 거쳐 처음으로 ‘실업자’라는 단어를 부여받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동북아시아 정치를 배우며, ‘급변하는 정세‘라는 말에 대해 인상깊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항상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에게는 ’급변하는‘이라는 말을 붙이는 대신, 그냥 그것이 안정적인 패턴이라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공공기관에서의 퇴사 이후, 나는 예술인과 사회인 사이를 진자운동하듯 반복해댔다. 연극 작업을 하고, 외국계 기업에 취업을 했다. 출퇴근 거리를 제대로 계산하지 않은 취업은 건강 악화로 이어졌고,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취업은 조기 퇴사로, 어줍잖게 한 연극작업은 또 다른 현타를.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한강 이남의 작은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이미 나는 다섯 번째 명함을 받아들고 있었다.
입사와 퇴사를 반복할 때마다, 집으로는 건강보험공단의 한 장짜리 서류가 날라왔고. 내 이름이 부모님 밑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나의 건강보험은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
마지막 회사에서의 퇴사를 앞두고, 나는 완전히 좌절되어 있었다. 사기업, 공공기관, 외국계 기업, 교육기관, 시민단체까지. 나는 사회의 모든 곳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회부적응자처럼 느껴졌다. 연극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제대로 연극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나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눈물을 배게 삼아 수 많은 밤을 보내던 어느날. 그리고 한예종에서 최종 탈락을 받은 나는 한없이 비겁하기만 했던 나를 마주했다.
진로라는 길에서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길에서 만난 연극이라는 존재에 매혹됐고, 그를 내 운명이라 여기고 그 운명만을 가치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그 운명에 몸을 던지지도 못했다. 동시에 인생이라는 진로라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 필요한 노력 그리고 성실함의 가치를 소홀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