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효이재 Oct 30. 2022

4.4 목표의 페르소나 4. 발견과 실행

열망의 현실화에 필요한 7가지 과학적 관점과 맥락

Norah Jones - Come Away With Me


열망의 현실화에 필요한 목표의 관점 넷:

목표는 계획하지 않은 발견을 지나치지 않고 발명으로 실행하는 노력과 과정이다.


 우리가 목표(관리)에 대해 새삼 알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발명’이 늘 전략적 가설과 실험, 실행이라는 프로세스 체계 안에서 통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팅커링 메커니즘으로서의 현실화 실험이 진정한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때때로 실험과 가설 자체를 벗어나 발생하는 우연의 상황에 대비하고 열려 있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과학 역사학자들은 현대 물리학의 시작점을 윌리엄 뢴트겐Wilhelm Röntgen이 X-선 논문을 발표한 1895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X-선이 방사선학, 핵물리학, 양자역학 등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의학의 혁신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X-Ray는 우연의 결과입니다. 심지어 ‘잘못된 가설’의 산물입니다. 1895년 당시 뢴트겐 교수는 음극선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음극선관 현상은 공기조차 없는 유리관 내부를 지나는 붉은빛의 음극선에서 신비로운 형광색 빛이 생기는 미스터리였습니다.


 

[그림] 전원을 넣기 전(좌)의 음극선관(Crookes Tube)과 고전압이 흐를 때(우)의 모습. 음극선이 유리관에 부딪힐 때 녹색의 형광빛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리관에 십자가 모양의 그림자가 생기는 것으로 음극선이 일반 금속을 투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 위키피디아



 진공상태를 지나는 음극선이 무엇과 반응하여 이런 빛이 나는 걸까? 많은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아무도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뢴트겐은 1년 전인 1894년 5월에 음극선관 연구로 유명한 레너드Phillpp Lenard에게 음극선 실험 장치에 대해 문의하며 자신의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뢴트겐의 실험은 유리관을 투과한 음극선을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비로운 형광색 빛은 음극선이 유리관을 투과하며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뢴트겐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잘못된 가설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음극선은 유리관을 투과하지 못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뢴트겐은 아주 적은 양의 음극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이런 가설을 세우게 된 것은 레너드의 음극선 실험 장치 때문입니다. 레너드는 음극선이 아주 얇은 금속(알루미늄) 판을 투과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금속도 투과할 수 있기 때문에 유리관도 투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리관을 투과한 음극선은 세기가 아주 약할 것이라고 가정한 뢴트겐은 밝은 음극선관 빛을 차단하기 위해 검은색 마분지로 음극선관을 완전히 감쌌습니다. 그리고 실험실도 완전히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음극선관에 고압의 전류를 흘렸다. 뢴트겐은 실험장치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어떠한 빛도 음극선관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실험 장치를 살피던 중 언뜻 희미한 형광 빛을 본 것 같았습니다. 혹시 음극선관이 덜 가려졌나 하는 생각에 검은색 마분지를 꼼꼼히 차단하고 다시 실험을 하니 그 희미한 깜박임은 실험 장치 맞은 편 의자 쪽에서 나오는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도대체 의자 쪽에서 왜 빛이 나는 지 궁금한 뢴트겐은 실험실 불을 밝히고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의자 옆 책상 위에 놓아둔 물건을 확인한 그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극선이 닿으면 형광빛을 발하는 백금시안화바륨 용지였습니다. 마분지로 감싼 유리관을 관통해서 나온 음극선을 확인하려고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공기 중에서도 겨우 3 센티미터 정도 밖에 날아갈 수 없는 음극선이 수 미터나 떨어진 책상 위에까지 도달할 수 있나?" 뢴트겐은 백금시안화바륨 용지와 반응한 것은 음극선이 아닌 다른 종류의 빛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뢴트겐은 흥분에 떨며 이 보이지 않는 빛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한 실험을 바로 시작했습니다. 주말 동안 밤을 새우고, 그다음 주에는 아예 실험실에서 먹고 자며 계속 실험을 반복했습니다. 1000 페이지가 넘는 책도, 2.5cm 두께 알루미늄판도, 5 cm 두께 나무판자도 이 빛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뢴트겐은 실험실에서 가장 무거운 금속인 납 상자를 손으로 집어 들어 빛이 나오는 곳에 대었을 때 백금시안화바륨 종이는 또 다른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빛을 차단해서 생긴 납 상자의 그림자 옆에 무언가 아주 희미하게 인화된 것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손가락뼈 모양의 그림자였습니다. X선이 말그대로 ‘발견’된 순간이었습니다. 노벨의 유언에 따른 노벨상이 사상 처음 수여된 1901년도 노벨 물리학상의 수상자는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이었습니다.


그러나 뢴트겐의 행운을 결코 단순한 우연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X선 발견의 단서가 되었던 음극선관 주변의 발광현상, 즉 음극선관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현상은 뢴트겐에 앞서 다른 과학자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룩스관이라는 음극선관을 발명한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도 진작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진 건판이 못쓰게 되었다고 불평만 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레나르트Philip Eduard Anton Lenard; 1862-1947 역시 음극선관을 이용한 실험을 많이 하면서 음극선관 주변의 발광 현상을 자주 접하였는데, 그는 뢴트겐이 음극선관 실험 장치를 제작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레나르트 역시 음극선을 금속에 통과시켜 나타나는 현상 등 음극선의 성질 자체의 연구에만 주력하였기 때문에, X선 발견의 기회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비록 레나르트 역시 음극선의 연구로 1905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X선 발견과 같은 획기적인 업적을 뢴트겐에게 양보(?)하게 된 것을 무척 아쉽게 여겼다고 합니다.


X선 발견의 결과, 20세기 초반의 물리학은 새로운 발전과 도약의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즉 프랑스의 과학자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은 역시 비슷한 실험을 통하여 X선과는 약간 다른 존재인, 우라늄으로부터 나오는 방사선을 발견하였고, 그의 조교였던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이후 방사선과 방사능에 대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크룩스관에서 나오는 음극선에서 발생되는 음극선이 음의 전기를 띤 입자들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즉 전자Electron의 존재를 발견한 것입니다. 방사선을 발견한 베크렐은 퀴리부부와 공동으로 1903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전자의 존재를 입증한 톰슨 역시 1906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X선의 발견이 원자핵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셈입니다. 이후에는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에 X선을 쬐여서 구조를 알아내는 X선 결정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X선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인체 내부의 사진까지도 찍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의학의 발전에도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혁신, 발명은 때때로 계획적 설계가 아니라 우연한 발견이 실행됨으로써 완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실행이 반드시 발견과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X선 현상의 실마리는 이미 당시 유사한 실험 연구를 하던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es 에게도 나타났지만 그는 사진 건판이 못쓰게 되었다고 불평만 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바로 발견적 상황에서 발견을 알아챌 수 있는 상상력, 우연과 행운에 의해 자신이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 세계의 절반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발견은 애초 우리의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벗어나 있습니다. (다만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목표, 목적에는 또다시 연결되어 있다.) 계획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발견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목표에 대한 반서재적 태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열망의 신호 패러독스 균형에서 언급: 움베르토 에코는 5만여권 이상의 방대한 서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시골 서재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크게 두부류로 나눈다고 합니다. 첫번째 부류는 읽은 책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이 방대한 서재의 책들을 모두 읽었는지, 몇 권이나 읽었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두번째 부류는 매우 적은데, 이들은 오히려 서재가 읽은 책이 아닌 읽지 않은(읽을) 책들로 채워지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개인 서재는 혼자 만족하거나 또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 실질적인 연구를 위한 도구임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미 읽은 책은 읽지 않은 책보다 가치가 떨어집니다.『블랙스완』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에코의 서재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며 ‘서재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관련된 책을 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 알면 알수록 읽지 않은 책이 줄줄이 늘어나는 법이며 읽지 않는 책이 늘어선 대열, 이것을 ‘반서재’로 명명합니다.[i])

 발견된 것을 가지고 오직 상상력을 발휘해 그것이 세계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알아채는 안목이 또다른 혁신,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컴퓨터 운영체제를 생각해봅시다. 컴퓨터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는 쉽게 말해 우리가 직관을 바탕으로 컴퓨터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아이콘 등의 그래픽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으로 그것이 아닌 컴퓨터는 상상할 수 없지만,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이전의 컴퓨터는 컴퓨터 사용자가 컴퓨터의 사고 회로에 맞춰 복잡한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작동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 당연한, ‘GUI의 대중화’는 정확한 상상과 그에 따른 설계로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의 한 켠에서 그것이 장차 세상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줄지는 모른 채 소수 연구자들의 연구주제로 갇혀 있던 것을 그곳을 견학하던 스티브 잡스와 애플 관계자에 의해 우연히 ‘발견’ 된 것입니다.


제록스는 우리가 여전히 잘 알고 있듯 프린터 회사입니다. 하지만 제록스는 사실 그 이상으로 충분히 위대해질 수 있는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돌이켜보면 너무도 확연한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습니다. 1970년 제록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첨단기술을 연구하는 팔로알토 연구소(PARC: Palo Alth Research Center)를 세웁니다. 제록스는 당시 시장 최고 대우를 바탕으로 인재를 흡수했습니다. 뛰어난 인재들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흥분 때문에 PARC에 끌렸습니다. 1973년 PARC의 연구원들은 알토Alto라 명명한 컴퓨터를 만듭니다. 이 컴퓨터는 한 대당 한 명의 사용자를 지원했고 모니터 화면을 통해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고 빠르게 작동했습니다. 알토는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는’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였습니다.


 1973년은 훗날 개인용 컴퓨터 시장과 함께하게 되는 기업, 개인들은 아직 어떤 관련도 없던 때였습니다. IBM은 여전히 전기식 타이프라이터를 내놓고 있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하버드 신입생이었으며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인도를 배회하던 대학 중퇴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혁신의 주인공은 제록스가 아니었습니다. 혁신과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들은 그로부터 10년여 후 IBM과 애플,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였습니다.


 PARC가 세계 최초의 (그러나 상용화되지 않은) 개인용 컴퓨터 알토를 만든지 6년 후인 1979년 스티브잡스가 PARC를 방문했습니다. PARC는 처음엔 으레 견학을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던 수준의 형식적인 신기술 시연을 했지만 그 잠깐의 순간에서 스티브 잡스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고, 자신의 네트워크를 총 동원해 몇번의 실랑이 끝에 PARC 연구진으로부터 세가지 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시연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스티브잡스, 그리고 빌 앳킨슨(Bill Atkinson) 등의 동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특히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컴퓨터(리사, 매킨토시 등)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목표하고 개발하던 ‘동적 인터페이스’가 PARC에서 상상도 못할 차원,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은 수준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가자마자 애플이 몇 년간 준비했던 계획, 실행을 바로 뒤집어립니다.


 스티브 잡스는 한 인터뷰에서 훗날 이렇게 후술합니다. “제 평생 본 것 중 최고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머지 기술들(객체지향 프로그래밍*, 네트워크 시스템: 이 두 가지 기술 역시 컴퓨터 역사에서 혁신적인 기술로 손꼽힙니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어요.. 아이디어의 싹이 거기서 제대로 피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0분도 안봤는데 미래의 모든 컴퓨터가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누가 그렇게 할진 모르지만 그건 불가피할 거라 확신했습니다… 제록스 경영진은 자신들이 뭘 만들었는지 자신들이 출근해 보는게 뭔지 몰랐습니다... 컴퓨터 산업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패배로 만든 장본인들이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Object-Oriented Programming)은 실세계에 존재하고 인지하고 있는 객체(Object)를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 표현하기 위해 객체의 핵심적인 개념 또는 기능만을 추출하는 추상화(abstraction)를 통해 모델링하려는 프로그래밍 패러다임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변의 실세계에서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을 프로그래밍에 접목하려는 사상을 의미한다. 이 때 각 객체는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고, 데이터를 처리할 수도 있으며, 또다른 객체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각 객체는 별도의 역할이나 책임을 갖는 작은 독립적인 기계 또는 부품(레고 블록과 같은)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 때 먼저 그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레고 블록을 만들고 이를 조립해서 하나의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이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어떤 블록 없이 처음부터 순수하게 컴퓨터가 이해하는 절차적 명령어로만 프로그램을 쌓아 올리는 것을 절차지향 프로그래밍이라고 한다.



  PARC는 위대한 기술과 제품을 발명했지만 그것을 시장에 내놓을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제록스 본사는 일련의 위대한 성취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발견’이 없는 ‘실행’이 있을 리도 만무합니다. 79년 스티브 잡스와 함께 PARC를 방문했던 컴퓨터 엔지니어 빌 앳킨슨Bill Atkinson은 강력한 영감을 받고 돌아와 그 스스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면에서는 좀 더 나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운영체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회오리바람 같았던 그 방문은 제게 자국을 남겼습니다. 어떤 것이 해결될 수 있음을 아는 것은, 그것이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을 방명하도록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PARC연구원들은 처음 애플이 등장했을 때 그들은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방문해 자신들의 연구에 광적인 열정을 보일 때 마치 번개에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성과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던 제록스를 위해 만들었던 기술 – 그래서 이것이 세상에서 정작 어떤 역할을 할지 잘 몰랐던 – 대부분의 성취를 제록스를 벗어난 바깥 세계에서는 두 손 들고 반기리라는 강력한 신호였습니다. 스티브잡스와 동료들이 열어 제낀 문을 통해서 나온 것은 PARC의 아이디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 인재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습니다. 그들의 빛나는 아이디어와 성취는 제록스 바깥의 시대와 시장을 읽고 있던 사람과 기업들이 재빠르게 가로채 갔습니다. PARC와 제록스의 극적인 불협화음 속에서 지쳐간 사람들까지, 시장은 재빨리 ‘발견’하고 ‘실행(영입)’ 했습니다.**        


** 대표적으로 당시 애플이 충격 받은 객체지향프로그램, GUI 개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엘런 케이와 래리 테슬러, 그리고 존 워녹 등이 있다. 1980년 애플은 PARC 개발한 객체지향프로그래밍 ‘스몰토크’를 사용할 수 있게 라이선스를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제록스는 난데없이(그간 PARC의 기술 상용화에 아무 관심이 없다가) 고유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터져나와 그 제안을 거부했다. 이 때 애플은 이를 다룬 래리 테슬러에게 영입을 제안한다. 래리 테슬러는 PARC 팀의 지향점이 제록스보다 오히려 애플에 더 가까움을 느끼고 이를 바로 수용한다.


엘런 케이는 스몰토크의 창시자로 객체지향프로그래밍,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 그리고 현대 노트북, 태블릿 PC의 원형이 되는 다이나북 개념/아이디어를 제시한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PARC안에서 끝내 상용화되지 않았고 지친 그는 PARC를 떠난다. 앨런 케이는 1984년 애플에 합류해 컴퓨터의 교육적 활용가능성에 주목해 연구를 이어 나갔다. 존 워녹John Edward Warnock은 PARC에서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 기술을 개발했다. 포스트스크립트 기술은 기기나 플랫폼에 상관없이 문서를 균일한 모양과 품질로 출력할 수 있는 기술로 우리가 잘 아는 PDF기술이다. 그 역시 PARC에서 포스트스크립트 기술의 상용화가 무산되자 동료 찰스 게스케와 PARC를 나와 어도비를 설립한다.


1985

년 애플이 최초로 어도비의 포스트스크립트 언어를 자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레이저 프린터 '레이저 라이터(Laser Writer)'를 출시하면서 시장의 선택을 받는다.


 

 우리는 목표의 층위와 문제-해결의 스펙트럼을 넘나들며 변하지 않는 ‘북극성 목표’를 열망하되, 때로는 목표와 확신, 판단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구체성과 문제의 영역에 몰입하면서도 그 안에 갇혀 새로운 발견 -그러나 추상성의 목적과는 좀 더 맞닿아 있는- 을 놓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만 모든 것이 이뤄지고 그것이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구체성에 대한 몰입과 동시에 ‘반서재’적인 이중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관찰, 우연, 나아가 발견의 흐름 앞에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4.5 목표의 페르소나 5. 피벗(Pivo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