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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좋은 계절이야.

by 단어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었어. 이렇게 글의 첫 문단을 시작한다니, 대체 얼마나 좋은 날을 보낸 건가 싶지? 오늘은 교회를 갔어. 우리 교회 3층에는 내가 주로 예배를 드리고, 떠들고, 자고, 노래를 부르는 곳이 있어. 오늘은 그곳을 청소하는 날이었거든. 우리는 매 달 셋째 주마다 청소를 해. 쓸기, 닦기, 화장실 청소, 창문 닦기...... 누구나 그렇듯 화장실 청소는 기피 대상 1호야. 나는 운이 좋게도 화장실 청소를 피해 갔어. 나의 역할은 쓰레기통 비우기! "와, 나 쓰레기야!"라고 외치는데 말하고 나니 어감이 참 이상하더라. 쓰레기라니..... 내가 쓰레기...? 뭐 하지만 모두들 그 말을 듣고 웃었고, 나도 웃었으니 나쁘지 않은 문장이었다고 생각해.


쓰레기통 비우기는 대청소의 마지막 차례야. 모두들 쓸고 닦으며 생긴 먼지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야 우리는 쓰레기통을 비울 수 있어. 방만 깨끗해진다고 해서 청소가 끝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 방이 깨끗해졌다면, 그 방의 쓰레기들을 잔뜩 모아 둔 쓰레기 통도 비워야 해. 그러고 나면 비로소 청소가 끝나는 거야.


쓰레기 통을 비우고, 다시 3층으로 올라와서 방으로 들어서는데, 창문 밖의 햇빛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야. 3층은 교회 건물의 거의 맨 꼭대기 이기도 하고, 엄청 큰 창문 두 개가 있어서 창문을 열면 밖의 풍경이 훤이 보여. 전망대에 따로 갈 필요가 없어.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온 동네가 한눈에 들어오거든. 두 창문은 활짝 열려있고, 햇빛은 가득 들어오고, 하늘은 그 높디높다던 가을 하늘이었어.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 앉아 있었지. 동그랗게 앉아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어. 웃긴 이야기, 슬픈 이야기, 화가 나는 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럼에도 사랑하자는 이야기까지. 날씨는 너무나도 가을이었고, 당신들은 너무나도 다정해서 마음이 참 좋았어. 미안해. 우리가 나눈 대화들은 그저 마음이 좋기만 한 대화는 아니었는데. 누군가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누군가는 걱정하는 동안 나는 그 대화보다 그 순간에 더 집중하고 있었나 봐. 나도 분명 그 순간에는 심각했던 것 같은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마음이 그저 좋기만 하네. 꼭 소풍 온 것 같았거든. 바람이 살살 불고, 다정한 사람이 있고 다정한 대화가 있고 다정한 시선이 있고. 그게 소풍이지 뭐겠어?


요즈음 세상이 너무 어지럽잖아. 다들 화가 나 있거나 지쳐 있거나 슬픔에 빠져 있거나.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우리의 무수한 대화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는 같이 화를 내야 할까 같이 슬퍼해야 할까. 우리의 분노와 슬픔은 힘이 있을까. 우리의 대화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도 가을은 오지 뭐야. 어김없이 바람은 불고, 하늘은 높아지고, 낙엽은 하나 둘 떨어지고.

아주 슬픈 대화를 하면서도 나는 가을이 오고 있음에 기뻐해. 참 아이러니 한 일이야. 하지만 세상에는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너무 많은 걸. 슬퍼만 하기에는 아깝고, 기뻐만 하기에는 무언가 미안한 순간들이 너무 많은걸. 나는 당신들 때문에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 걸. 당신들도 나 때문에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겠지.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모든 기쁨과 슬픔이 한대 모여 섞여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어. 나의 기쁨이 너에게는 슬픔이 되고, 때로는 나의 슬픔이 너의 기쁨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나에게 고기를 사주고, 나는 너에게 반창고를 건네. 마냥 슬프지도 마냥 기쁘지도 않은 게 인생인가 봐. 나는 마냥 착한 사람도 아니고, 마냥 나쁜 사람도 아닌 것처럼.

이대로 오늘밤을 보내는 게 아쉬워서 버스에서 한 정거장 빨리 내려. 좋아하는 가을 노래를 들으며 걷는데 나와 아주 격동의 가을을 함께 보냈던 동생에게 카톡이 온 거야.

언니, 이 노래를 듣기 좋은 계절이 왔어. 마음이 좋은 계절이야.

그러게. 정말로 마음이 좋은 계절이다.

라고 답을 보내고는 오늘 하루가 참 좋았다는 생각을 했어.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힘들어하고, 때로는 힘든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뒤돌아서서는 여전히 사랑을 하겠지. 무엇하나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마음이 좋다는 건 어떤 걸까.


우리는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만나고, 또 무수히 많은 대화를 나눌 거야. 그 대화 속에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할 거야. 이런 어지럽고 예측불가능한 세상에서 우리는 사랑을 해. 이게 정말 마음 좋은 일이야.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슬프겠지만, 오늘은 사랑을 하는게 어때? 꽉 찬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좋은 마음만 채우는 오늘이 되기를 바라. 그럼 내일 또 다른 슬픔이 다가와도 우리는 제법 견딜만할 테니까. 슬픔과 아픔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힘이 필요하니까.


마음이 좋은 계절이야.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힘과 사랑을 얻기에 비교적 쉬워진 계절이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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