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Prom)의 계절

by 순금

길었던 캐나다의 겨울이 끝났다. 간간히 눈이 내렸지만 그 와중에도 나무는 새순을 피워냈다. 날카롭던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햇살이 비추는 날이 많아졌다. 꽃봉오리들이 터질 듯 말 듯 부풀어 오르고 내 마음도 몽글몽글해지는 계절. 바야흐로 봄.

나는 페디큐어 스테이션 붙박이를 거쳐 네일 스테이션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제는 손님들이 원하는 웬만한 네일 아트는 제법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누군가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내 실력이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네일아트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캐나다 시골에 위치한 네일숍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손님들이 기대하는 것도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다.

초보 시절(여전히 초보이지만), 만약 내가 한국에서 이 정도 수준의 서비스를 받았다면 분명히 환불을 요구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만을 얘기하는 손님을 만난 적이 없다. 구글 리뷰를 보면 안 좋은 후기를 남기는 손님들이 있지만 네일숍 안에서는 없었다. 아마 캐네디언들에게 습관처럼 배어있는 배려심 때문이었으리라. 관리 중에 슬쩍슬쩍 손님을 보면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굳어버린 표정으로 앉아있다가도 관리가 끝나면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팁을 남겨주고 간다. 그런 손님을 보내고 나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좀 더 잘할걸. 좀 더 예쁘게 해 줄걸. 하지만 손님은 이미 떠나고 기회는 사라지고 난 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많은 연습과 주어진 시간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날씨가 살짝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의 어느 한가한 오후, 네일숍이 있는 몰 건너편의 공동묘지를 둘러싼 거대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소녀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설렘과 흥분, 신남과 수줍음이 뒤섞인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곧 네일숍 문을 짤랑 열고 들어왔다. 다섯 명의 소녀들. 하이스쿨 졸업식인 프롬(PROM)을 앞두고 손톱을 꾸미기 위해 들린 친구들이었다. 네일 스테이션이 꽉 찼고 테크니션들이 다들 한 사람씩 맡아 자리에 앉았다. 보통 평일에는 3명의 테크니션이 일하는데 이 손님들을 위해서 시간 맞춰 한 명이 더 출근했고, 보통 본인의 예약손님만 관리하는 보스도 자리했다. 원하는 손톱 모양과 색깔, 디자인에 대해 얘기하느라 분주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테크니션은 집중하고 손님들은 긴장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손님들이 긴장하는 포인트는 크게 두 부분이라고 생각되는데, 큐티클을 잘라내는 니퍼에 찔려 피가 날까 봐, 그리고 관리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진행이 안될 때다.




소녀들 중 한 명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테크니션이 말을 걸어도 들릴 듯 말 듯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치를 챈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소녀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이미 관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인조 손톱을 붙여 연장을 하고 그 위에 자외선으로 컬러를 건조하는 젤네일을 한 상태였고 수정을 하려면 절차가 복잡한지라 테크니션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테크니션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물었지만 소녀는 끝내 괜찮다고만 하고 서둘러 계산을 하고는 친구들보다 먼저 숍을 나가버렸다. 남겨진 친구들의 표정도 어두워져서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마음이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달고 깊은 호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들었다. 내 손님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에게 손을 내준 다른 소녀도 내가 고개를 묻고 그녀의 손을 만지고 있는 동안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네일숍에는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으러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결혼식, 졸업, 장례식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핼러윈, 크리스마스처럼 시즌을 특별하게 즐기기 위해서 오는 손님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손님 인생의 소중한 순간에 내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관리해 준 손톱이 사진에 남아 영원히 남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오후 다섯 시. 일곱 시까지 오픈시간이지만 더 이상 예약손님이 없으면 슬슬 청소를 시작하는 시간. 짤랑 문이 열렸다. 많이 울어서 눈이 부은 종전의 그 소녀가 할머니와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이 할머니 손녀였구나. 할머니는 정기적으로 와서 관리를 받으시는 분이라 낯이 익었다. 집에 와서 펑펑 우는 손녀가 안쓰러워서 손을 이끌고 오신 거였다. 당장 내일이 졸업식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손톱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을까. 보스가 소녀를 자리에 앉히고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어렵게 원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보스는 소녀의 인조손톱을 녹여 제거하고 다시 연장을 한 뒤 소녀가 원하는 디자인을 해주었다. 모든 것을 무료로. 시술을 다 마친 소녀의 표정이 밝았다.

십수 년도 더 지난 나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소녀 못지않게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았다. 거스름돈을 잘못 받아도 덜 받았다 말도 못 하고 그냥 가게를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근데 지금은 뭐든 따지고 들고 계산기 두드려보는 깐깐한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다. 다른 사람 기분을 먼저 생각하느라 아직도 가끔은 내 속이 문드러진다. 잠들기 전에 후회하면서 이불킥 하는 그 사람이 나다. 그래도 지금은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졌다는 걸 느낀다. 사람에게 상처도 덜 받고 내 기분도 챙긴다. 아직도 연습 중이지만 마음은 성장했다.

내일 졸업식이 끝나면 또 다른 세상으로 한 발 내딛을 소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그녀의 마음이 단단하게 성장할 때까지 받을 상처가 너무 많지 않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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