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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Sep 12. 2024

100. 오만과 몽상  

-박완서  「세계사」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를 낳고,,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 기업인을 낳고, 악덕 기업인은 현이를 낳고,,’     




주인공들을 두 축으로 나누는 말이다.  

서로의 그런 뿌리를 알고 있었어도 친하고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치부(가난과 친일)를 보여주며 지냈던 두 친구, 남상과 현이.


하지만 그들은 남상의 할아버지가 아무리 비참하게 살아도 독립군의 조상을 가졌으니 친일파의 후손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끈질기게 종용하는 바람에 갈라지게 된다.


스스로 잘난 게 아니라 배경 덕에 넌 뭐든 될 것이고 난 내 가난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패배감을 쏟아내고 남상은 현과 절교한다.  


그의 일방적인 선언에 뼈저린 배신감을 느낀 현은 남상과 똑같이 가난을 겪으며 남상의 꿈인 의사가 되는 것으로 복수를 하려 한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현은 남상이가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되뇌며 끔찍한 가난을 몸소 체험하면서 악착같이 살아간다.  


한편, 남상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마치 한번 가난한 사람은 대를 이어 영원히 가난해야 한다는 굴레에 씌워진 것처럼 부자가 되기는커녕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로 힘겹게 살고 있다.  


둘은 그러면서도 서로를, 세상의 잣대를 의식해 왔지만 각자의 현재 모습을 본 후 그 족쇄 같은 생각을 풀어 버리고 본래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된다.


현은 자기 집안의 부를 마음껏 누리고

남상은 양심을 신경 쓰지 않고 부를 쌓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가장 소중한 사람과 그때까지 가진 모든 것을 잃으면서 무너지고 만다.  


슬픔과 회환 속에서 넋을 잃고 살던 남상은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며 옆에 있는 사람들과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이제부터 진짜 ‘의(義)’를 위해 투쟁하는 남상이가 될 것 같다.     


역시 박완서 작가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독립투사의 후손이 가난 때문에 지레 포기한 의사의 꿈을 친일파의 후손이 그 가난을 고스란히 겪어내면서 이루어 버리는 것.  

한 명은 보란 듯이 적성에 맞지도 않은 일을 해내고, 다른 한 명은 그걸 반면교사로 삼거나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친일파의 후손답게 하나밖에 없던 자신의 꿈까지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는 것.  


오만과 몽상.

책 제목이 정말 소설 속 주인공들을 정확하게 표현해 준다.  그리고 그 오만과 몽상은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마음 같다.


나를 알고 내 꿈을 향해 살기보다는 그럴듯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싶어 하고 연봉이 얼마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많이 벌어야 하고 잘 나가야 한다.  

나의 본성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  남한테 과시하기 위해서든 밟히지 않기 위해서든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남들이 추켜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오만과 몽상의 시절 속에서 내가 원하던 삶을 살지 못했던 건 내 능력부족 때문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대 왔다.  

이젠 좀 활짝 핀 내 인생을 살고 싶다며 그 지겨운 직장을 뛰쳐나왔지만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버둥거린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보여줄 만한 무언가를 해야 하니까.  


빈부격차, 남존여비, 인간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면, 추악한 속마음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해 내는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내가 애써 감추고 기를 쓰며 보지 않으려 하는 아이러니 한 마음을 들킨 것처럼 움찔한다.  

박완서 작가가 지금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아쉽고 슬프고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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