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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막

2021. 6. 6. - 2021. 6. 7.

by 바람




오롯이 혼자다.

몇십 년 동안 발버둥 친 후에 얻은 시간들이다.

고독은 내가 원하고 즐기기까지 했던 마음이다.


그런데 쓸쓸함, 외로움, 고독감 같은 단어로는 설명이 안 되게 맘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함을 느낀다.

뭔가를 하고 싶고 새로운 곳을 가고 싶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은데.. 귀찮다.


어제는 하루 종일 한국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한국에서는 미드나 영드만 봤었는데 여기선 한드를 더 많이 본다.

아시안마트에서 사 온 진짬뽕에 파 송송 넣고 끓여서 종갓집 김치와 먹고 맥주 한 캔 마시면서 거실책상과 소파, 침대를 왔다 갔다 하며 드라마만 봤다.

오늘 아침에 남은 두 편을 마저 보고 10시 넘어 카페에 왔다.


대인기피증을 앓는 것 같은 상태지만 오는 길에 아빠와 어린 아들이 장난감통을 나누어 들고 길을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 안의 사랑과 정이 넘쳐서 쉽게 그 마음을 줬다가 예민함과 보상심리에 또 금방 상처를 받으니

난 사람을 싫어한다며 스스로 외투막을 겹겹이 입고 살아온 것 같다. 어리석다.


카페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것도 정겹다.

조용히 책 읽고 싶은데 카페에서 사람들이 떠들면 짜증이 날 때도 있었는데 어제 하루 종일 집콕하며 침잠하다 나오니 기분이 다르다.

상황에 따라 내 마음은 갈대가 된다.


익숙한 올드 팝송이 들린다.

중학생 때 라디오에서 즐겨 듣던 음악을 이렇게 먼 나라에서 들으니 집과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편안하다.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진리 같다.

내가 혼자인 걸 좋아하는 건 맞지만 가끔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립다.

어제오늘 본 드라마 때문인지 자꾸 눈물샘이 고인다.

디어 마이 프렌드. 노희경 작가의 글을 노련한 연기자들이 열연하면서 내 마음을 휘젓고 울다 웃다 하게 만들었다. 우리 엄마 세대가 안쓰럽다.

내 엄마께라도 잘해야 하는데 마음뿐이다.

마음, 돈, 시간, 행동이 함께 해야 한다.






몰타에 와서 처음 맞은 이곳 공휴일이다.

뭘 기념하는 날인지 모르겠다. 궁금하지 않다.

어제저녁부터 팡팡거리는 소리가 들려 창문 밖을 보니 멀리서 불꽃놀이 하는 게 보였다.

밤에 발레타의 거리를 한번 걸어보고 싶긴 한데 저녁 이후에는 어딜 다니기가 좀 불안하기도 하고 한번 집에 들어오면 얼른 씻고 편해지고 싶다.

3일 연휴라 내일 또 반 학생들이 어디 다녀왔는지 이야기하고 니나선생님도 뭐 했는지 물어볼 테니 스피킹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한다.

대통령이 산다는 San Anton Garden을 선택했다.


핸드폰 데이터 top-up을 안 한 탓에 집에서 버스경로 등을 tallinja 앱으로 찾아놓고 길을 나섰는데도 그곳으로 가는 버스의 정류장을 찾지 못해 잠시 길 위에서 방랑하다가 그냥 계획을 바꿔버렸다.

coffee circus로 가서 진한 카푸치노 마시며 여유롭게 책 읽다가 그 옆 SPA 슈퍼에서 장 보고 카레 만들어 먹기로.

계획이랄 것도 없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남한테 말하기 위해 억지로 어딘가 가고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기로 한 거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온 것 같다.

남한테 말하고 자랑하려는 것.

다른 사람에게 날 평가하고 인정하고 말고 할 기회를 주는 것.

그런 인정욕구가 이런저런 작은 성취들을 이루게 했다 해도 나를 온전히 자유롭게 해주진 않는다는 걸 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해도 앞으로 10년 정도는 내가 나를 보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 그런 식으로 인이 박히겠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거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나도 남을 재거나 평가하지 않고 평온하게.


카페주인이 내가 커피사진을 찍으니 자기 커피가 어디로 가냐고, 일본으로 가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말해주고 이곳 커피는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니 브라질, 과테말라, 에티오피아의 블렌드라고 한다.

몰타에서 마셔 본 커피들 중 베스트라고 하니 자기네가 직접 로스팅을 해서 신선하니까 그런 것 같다며 고맙다고 한다.

집 근처의 아늑한 북카페에서 한국보다 싼 값에

더 풍미 깊은 카푸치노를 마시게 해 줘서 내가 더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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