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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2021. 7. 6. - 2021. 7. 7.

by 바람 Mar 16. 2025




48세라는 보스니아 출신의 남자 선생님은 아픈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걷는다.  

말은 유치원생에게 하듯이 느리게 늘여 빼며 해서 첫 수업부터 한숨이 나왔다.

사람을 너무 타는 나는 앞으로 3개월의 수업시간을 어찌 버틸지 참 걱정이다.

게임한다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그의 수업에도 장점은 있을 테니 억지로라도 찾아야 생존할 수 있다.  


방학 동안 스위스에 다녀왔다는 T가 대자연의 사진을 보여주며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깨끗하고 맑은 자연을 보면서 내가 많이 좋아할 것 같았단다.  

자신의 상태가 대인기피증 같다는(나도 그렇다) 그녀를 밖에서 보면 아는 척 하기도 어색하지만 그래도 좋은 풍경을 보면서 날 생각해 줬다는 게 고맙다.

비행기, 숙박 예약, 코로나 검사, 짐 챙기기..

별거 아닐 수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번잡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절실히 원하는 게 아니어서 그럴까.  

지중해의 섬나라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걸까.  

나중에 내 아이들과 함께 가기 위해 아껴두고 싶은 건가.  

이런 생각들도 나의 귀차니즘을 합리화하는 걸까.


한국의 지인들은 이곳에 와 있는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이곳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못하는 나를 자책한다.  바보.

이 마음을 잘 추스르고 다스리지 않으면

내가 나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


너무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여백의 미를 생각하자.      






정유정 작가의 소설 ‘완벽한 행복’을 ebook으로 읽다가 갑자기 답답함을 느껴 노트북을 덮었다.  

종이 책장을 넘기는 건 아니어도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머리가 조이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지니 무섭기까지 했다.

얼른 파나돌 두 알을 먹고 유튜브로 벨리댄스를 따라 하고 땀을 흘린 다음 샤워하니 좀 나아졌다.  


옛 직장 동료가 올해 초부터 공황장애를 겪었다는데 나도 그런가.

원하는 걸 해놓고도 무언가 더 하지 못해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다른 시간과 장소와 사람들을 그리워해서,

갑자기 이 시공간에 갇힌 듯 숨이 막혔을까.


아침에 세바시 강연을 들었는데 불행한 완벽주의자에 대한 것이었다.  

비슷한 증상들이 좀 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면서도 더 잘하고 싶어 자꾸 미루고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나와 맞지 않지만 겉보기에 좋은 일을 계속하려 하고

정리정돈 강박이 있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자존심 상하고 나약한 듯 여겨지거나 혹은 거절당할까 봐 지레 겁먹어 차라리 손해 보고 만다.


이걸 좀 깨보겠다고  

내가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기도 하고 억지로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거나

일탈을 해보기도 하지만

마치 당긴 고무줄을 놓은 것처럼 다시 내 안으로 튕겨진다.  

이병률 시인의 ‘안으로 멀리뛰기’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 확 와닿았던 이유다.


이렇게 완벽히 혼자 있으니 다 안다고 생각했던 나에 대해 조금 객관화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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