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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박완서 작가의 단편들

그리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by 바람


♣ 기나긴 하루 -박완서 「문학동네」


소설집이다.

그중 ‘나의 가장 나종 지니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으로 이루어진 모노드라마 같다.

본인은 담담하게 말하지만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독자가 더 절절히 느끼게 해서 심한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다.

그 느낌은 내가 정리해서 말하기도, 쓰기도 어려웠는데 뒷장의 평론가가 쓴 글을 보고

‘그래, 이거!’라고 맞장구를 쳤다.


‘당사자의 고통을 짐작조차 못할 독자들마저도 압도해 버리는 이 실감’


자식을 민주화운동으로 잃고 난 후 성대한 장례식이 무슨 소용이며 사람들에게 추앙받으면 무엇하겠는가.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그래서 노모의 수발을 받으며 살고 있는 구박덩이 신세인 친구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노모에게 ‘견딜 수 없는 질투’를 느끼며 그동안 의연했던 자신의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이 대성통곡을 해 버린다.

그 질투가 너무나 와닿아 가슴이 아려서 혼났다.




♣ 보시니 참 좋았다 -박완서 「이가서」


'작가의 말'에 이 글들은 젊은 엄마와 아이들을 위하여 썼다고 해서 아이의 마음을 다시 갖고 싶어 선택했다.

아주 짧은 글들이지만 꼭 매실진액처럼 진득한 맛이 나는 동화집이다.

가장 나중까지 여운이 남는 것은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이다.


봄뫼네 마을 산이 산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어떻게 사랑받고 시달리고 아프고 꼴사납게 되어가는지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소위 문명화된 사람들이라는 현대인의 사고와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건 꼭 자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사람 사이에서도 왜곡된 마음이 어떻게 관계를 황폐하게 만드는지 겪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 해산바가지 외 -박완서 「창비」


가끔 아주 사소한 일인 것 같은데 나의 가장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며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경우가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들을 작가는 전쟁을 겪으며 또는 유신 시대의 공권력을 경험하며, 그리고 유교의 뒤틀린 가부장제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토해내고 있다.

시원하기도 하고 더 꺼림칙하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하고 다시 심란해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가 글쓰기의 동력이었다는 그의 말이 내 안의 깊숙한 욕망을 건드린다.



♣ 배반의 여름 -박완서 「문학동네」


누워서 침 뱉기 같은 감정이 있다.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해봤자 다시 내 찌그러진 신경만 더 누를 것 같은.

그래서 절대 놓아두고 싶지 않지만 내 의식 속에 제멋대로 침잠해 있는 그것들을 혼자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거릴 뿐이다.


이 책은 마치 그런 온갖 잡다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적나라하게 늘어놓고 하나하나 대면해서 그것들을 쓸어내 버리든 그 속에 침수당하든 알아서 하소 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 같다.

거추장스러운 사념들을 잠깐이라도 털어 버리게 해 준 소설이었다.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박완서 「세계사」


이런,,,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다.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듯한 묘사와 가면을 쓴 채 오히려 세인의 칭송을 받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작가의 인간관이 엿보이기도 한다.


연륜이 깊어질수록 세상살이가 녹록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비굴해지기도 한다.

어떤 일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아 나는 손쓸 틈도 없다.

그러면 나는 시무룩해지고 나의 애씀이 허무해져 괜히 시니컬한 사람이 되고 만다.

소설 속 주인공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두 개의 목소리와 양심이 낯설지 않다.


화성 우리꽃 식물원의 작약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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