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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Sep 14. 2019

성취 관점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도서 요약「삶이란 무엇인가 - 수전 울프」3.


3부는 주로 성취 관점의 삶에 대하여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3부에서도 2부에서 말했던 개인의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관점이 적절히 결합해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네요. 신으로부터 성취감이라는 주사를 맞은 시시포스의 사례를 들어 왜 우리의 성취감 추구하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삶에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럼 3부 시작하겠습니다.


※ 제공 중인 요약본은 책에 있는 글을 중심으로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최대한 책의 내용이 손상되지 않도록 정리했습니다만 원활한 이해를 위해 간혹 제 의견이 포함된 부분도 있습니다. 모쪼록 책과 함께 참고용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 수전 울프」1.- https://brunch.co.kr/@wringkle/127


https://brunch.co.kr/@wringkle/132






흔히 자기계발서에서 쓰여 있는 수많은 기술(技術)의 근본을 살펴보면 대체로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고 추구하라." 일 것입니다. 저 말을 종이를 늘려가며 이리 풀어보고 저리 풀어보니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 근본이 다를 바 없으니 자기 개발서가 그토록 똑같이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고 추구하라."라는 말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진심으로 관심 있는 대상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생의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경험적 가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열정이 담긴 행동을 통해 특정 형태의 '좋은 느낌(good feeling, 感)'을 얻을 수 있게 되죠. 이는 달리 말하면 충만감, 성취감 등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할 때, 완전히 몰입해 있을 때, 가슴을 뛰게 하는 활동에 참여할 때 성취감(feeling of fulfillment)을 느낍니다.   

감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취감은 지루함, 소외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감정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감정에는 성취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취와 상관없이 단지 쾌락과 관련된 것도 있죠. 또한, 성취감을 느끼고 살아간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죠. 가령,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몰입하는 것은 상당한 근심과 고통을 유발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열정을 추구하기 위해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감과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모습은, 성취감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분명한 가치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성취감이 다양한 긍정적 감정, 전형적으로 '행복'과 '기쁨'에 관련된 느낌과는 다르며 종종 이런 느낌과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성취 관점을 '삶의 의미에 기반을 둔 한 가지 주장'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안락, 명예, 부와 같은 피상적인 목표에 집착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조언을 들려준다고 하죠. 그러나 저자는 계속 논의를 계속 전개해 나가면서 '삶의 의미에 기반을 둔 한 가지 주장'일 수 있는 성취 관점도 쾌락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쾌락주의가 말하는 최고의 삶(삶의 의미를 담고 있는)의 기준은 전적으로 각각의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질적 특성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감정은 쾌락주의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가 되죠. 이런 까닭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데는 성취 관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조금 쉽게 말하자면, 성취 관점에서 삶의 중요한 가치가 개인의 쾌락, 즉 개인의 주관적 측면에만 달렸다고 할 때, 이 측면만 충족시키기만 하면 어떤 활동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개인의 열정을 발견하고 이를 추구한다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다시 말해 성취감을 얻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상 및 활동에 열정을 기울일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저자는 '성취감을 느끼는 시시포스(Sisphos Fulfilled)'의 사례를 듭니다. 아시다시피 시시포스는 지루하고 힘들고 허무한 노동을 영원토록 반복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존재입니다. 바로 '의미 없는 삶'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서 한가지 사고 실험을 통해 신이 그러한 시시포스를 불쌍히 여겨,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끼도록 그의 몸에 주사를 놓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새롭게 태어난 시시포스에게 바위를 굴리는 노동은 그야말로 최고의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시포스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그의 삶은 고통스러운 삶에서 최고의 삶으로 올라섰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야기에 앞서 왜 시시포스의 삶을 의미 없는 삶의 전형으로 꼽을까요? 그 까닭은 지루하고 힘들고 허무한 노동을 영원히 수행해야 하는 형벌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사고 실험에서 그의 노동은 더는 지루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성취감을 느끼죠. 그러나 그 일에 '허무함'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시포스의 노동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습니다. 신의 자비가 있다고 해도, 그래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게 됐다고 해도 그가 하는 일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삶에서 결핍된 것은 주관적인(성취감) 측면이 아니라 일 자체로서의 객관적 측면입니다.

어떤 이들은 최고의 삶이란 「자신보다 더 큰 존재(더 중요한, more important)에 관여」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더 큰 존재'라는 것은 물질적 크기가 아닌 '가치'의 크기 관점에서의 큰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크기에 대한 조건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크기라는 관념에서 더 느슨하게 접근합니다. 그래서 그 조건의 핵심을 자신보다 더 큰 존재라기보다는, 자신이 아닌 '다른(other) 존재'에 관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즉, 자신과 동떨어진, 자신의 '외부(outside)'에 가치의 원천을 두는 대상에 관여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며 이런 의미로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관여하라."라는 관점을 해석할 때, 이는 분명히 성공적이고 번영하는 삶을 위한 두 번째 독립적인 관점이 됩니다.

가치의 크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우리의 태양계를 들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지구라고 하고 가치 관점에서 더 큰 존재를 태양이라고 해 봅시다. 나라는 존재는 태양이라는 더 큰 존재의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스스로 자전을 하고 있죠. 나는 태양계에 속해 있고 그 안에서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 중심을 공전함으로써 계절을 만들어 내고 그 안의 구성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죠.

저자는 앞서 말한 '성취 관점'에 더하여 더 큰 존재에 관여함으로써 좀 더 발전한 형태의 '연립 관점(bipartite view)'을 제시합니다. 연립의 개념은 우리가 초, 중학교 때 배웠던 연립 부등식과 방정식을 통해 알고 있을 겁니다. 여하튼, 이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고 추구하라."라는 주관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성취 관점'과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관여하라."라는 두 번째 관점을 '합침(conjoining)'으로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다가갈 수 있는 더 나은 관점을 얻을 수 있죠.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삶이란, "행위자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행위자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에 긍정적인 관여를 하는(관계를 형성하는) 삶"을 뜻합니다. 삶의 의미를 '개인의 행복(행복감)' 또는 '삶에서 바람직한 모든 일(도덕적 의무)'이라는 일반적 범주보다 더 구체적인 '가치' 범주로 이해해야 하며,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이 적절한 조화(harmony)를 이루는 조건"으로 삶의 의미를 규정할 때, 보다 통합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의미 있는 삶에는 '객관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라는 조건을 추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스스로 관여하는 활동에 담긴 객관적, 외적, 독립적인 가치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관여 덕분에 자신들의 삶이 더욱 의미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시시포스의 의도와 무관하게 바위를 밀어올리는 행위가 인근 마을의 공포와 질병을 퍼뜨리는 주범인 독수리 떼를 쫓아버리는 기능을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에 따른 뜻밖의 긍정적인 효과에 그가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이 타인에게 도움(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관여)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때보다 바람직한(의미 있는) 삶이 됐다고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성취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좋은 느낌(good feeling)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 나눈 바 있습니다. 신보다 더 큰 존재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도 역시, 우리는 어쨌든 그런 관여를 통해 좋은 느낌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가치 있는 활동에 관여할 경우, 부분적으로는 가치 있는 사람이나 대상 또는 활동에 자신이 관여하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물론 객관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 발견할 수 있겠죠.)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관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관점을 좀 더 광범위한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어떤 계획이나 활동에 대해 우리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삶의 의미의 기준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예를 들자면, 간디나 마더 테레사가 행하는 비폭력 무저항이나 타인을 사랑하며 행하는 의미 있는 삶의 활동 가운데 그들이 검소하게 지내고 생명을 존중하려는 태도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행동과 더 큰 존재가 가지는 가치에 관여함에 따라 좋은 느낌(good feeling)을 기대하는 것이죠.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객관적인 조건(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관여)을 그런 관여에 따른 좋은 느낌이라는 주관적인 조건과 결합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주관적인 조건(성취감을 느끼는)에 객관적인 조건을 추가함으로써도 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관여를 통해 주관적인 '보상(reward)'까지 얻을 수 있다는 기대 심리를 포함하고 있죠. 가령, 저를 기준으로 볼 때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이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발이 잘 살 때에는 성취감도 있죠. 그러나 이렇게 글을 이곳에 올려서 많은 분이 보시고 추천을 할 것이라는 기대 심리도 있습니다. 제가 열정을 갖고 독서 모임을 계속 할 수 있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기대 심리가 조금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사실 내 공부하는 것이니까 괜찮다고 말은 해도 열심히 준비했는데 때때로 사람들의 참석이 저조할 때에 그렇지 않을 때보다 의욕이 꺾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 여기서 한가지, 사고 실험에서 신에게 주사(?)을 맞은 시시포스의 주관적 성취감에도 중요한 가치가 결여돼 있다는 주장에는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감을 느끼는 상태로의 변화가 그 이전의 무의미를 느끼는 것보다 나은 상태, 나은 삶일까요?
가령, 매일 주말도 없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11시에 퇴근을 하는 직장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무슨 사정이건 간에 현재의 직장을 떠날 수 없고 매일 일을 하면서도 성취감이 없으며 더불어 일에 대해 공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시포스급(?)의 직장인이 볼 때에는 시시포스의 삶에 적어도 성취감이라도 있는 것이 좋은 게 아닌가 항의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쾌락주의관점에서만 본다면 시시포스의 사례에서 유일한 변화가 주관적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전환은 '틀림없이' 그의 삶을 더 좋게 만든 것입니다.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의 태도가 이제는 긍정적인 감정과 태도로 바뀐 셈이니까요.


바위 밀어올리기가 어떻게 성취감을 주는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그는 신이 준 약에 대해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합니다. 첫째,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위의 가치를 보게 하는 일종의 유혹적 자기기만을 일으키는 약이다. 둘째, 그 물질은 지능을 낮추고 상상력을 저하함으로써 힘든 노동의 지루함과 허무함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판단력을 빼앗는 약이다. 이 두 시나리오 중 어떤 경우 간에 주사를 맞기 이전보다 나쁜 상태에 처한 것이죠. 정신병이나 자기기만 또는 지적 능력의 퇴보를 겪는 것이니까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나은 것'인지, 그래도 이왕 '돼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인지 이에 대한 생각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행복한 시시포스를 선택한 사람들조차 성취감을 느끼는 시시포스의 운명을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취감을 느끼는 시시포스가 기만을 당한 것'이라는 첫 번째 시나리오를 통해 우리는 성취감이라는 요소가 단순히 쳇바퀴 구르는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성취감을 제공하는 대상이나 활동에 대해 가치 있다고 말하려면 성취의 과정에 '인지적(cognitive)' 요소가 포함돼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창한 어느 날 평화로운 해변에 누워 있거나 아주 잘 익은 복숭아를 맛보는 것은 분명히 즐거움을 주는 일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성취감을 느낄 수는 없다. 어떤 일에 성취감을 느끼려면 '객관적으로(objectively)'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그 속에 존재해야 한다."

시시포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성취감'을 느낄 것으로 판단하는 가치에 열정적으로 관여하게 될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일 겁니다. 혹시 '나는 잘살고 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허무감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자기기만의 뽕(?)을 받은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죠. 나를 객관적으로 바로 인식을 해야 삶을 바로 잡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요약


1. 우리는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할 때, 완전히 몰입해 있을 때, 가슴을 뛰게 하는 활동에 참여할 때 성취감(feeling of fulfillment)을 느낀다.

2. 성취감은 개인의 쾌락, 즉 쾌락주의적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이 관점으로만 본다면, 개인의 주관적 측면만 충족시키기만 하면 어떤 활동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3. 우리는 '성취 관점'에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관여하라."라는 두 번째 관점을 합침으로 우리는 삶의 의미에 관하여 더 나은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 저자는 '연립 관점(bipartite view)'이라고 말한다.

4. 객관적인 조건(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관여)을 그런 관여에 따른 좋은 느낌이라는 주관적인 조건과 결합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삶의 의미를 바탕으로 한 행동에는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관여를 통해 주관적인 '보상(reward)'까지 얻을 수 있다는 기대 심리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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