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기의 의미|쓰기 도구로서의 폰|책 선택의 괴로움

나의 일상 여행기. (65)

by Chris
그림: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8(composition-viii-1923), 1923년, 캔버스에 유채, 140x201cm,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게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요."

아침에 일어나 학교로 바로 와서 자리에 앉아 글을 쓰려니, 문득 기상 모임을 함께하던 한 친구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공용으로 쓰는 게시판에 계속 하루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간단하게나마 일기를 쓰던 친구였는데, 갑자기 요즘에 쓰지 않고 있어서 궁금하던 차여서 물어봤던 것인데 뜻하지 않은 답변을 받은 것이다.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침부터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것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하루를 이 친구처럼 간단하게 기록하는 행위가 인생에 어떤 가치나 도움이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분명히 어떤 경제적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의무인 것도 아닌 건 분명하다. 일기 문학을 쓰고 출판을 해서 수익을 얻는 방법도 있으나 문학성이 뛰어나거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필 정도의 분량으로 계속 써야 가능한 일이다. 정신적으로 이익이 될까? 그것도 불분명하다. 혹 일기를 통해 마음의 위안이라도 받았으면 그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친구로서는 거의 2달을 써보고서 내린 결론이라 그런 위안도 못 받은 것 같다. 나로서는 글쓰기 능력의 향상과 더불어, 반복되는 삶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생각으로 사는 자신을 살피고 싶은 마음, 그리고 글로 출판을 하고 싶다는 의지 등이 동기가 되어 계속 쓰고는 있지만, 이 친구에게 나와 같은 생각으로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각자의 의미는 각자가 느끼고 만들어야지, 다른 사람이 주입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경우, 일기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일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재미가 있어서이다. 매번 다를 바 없이 반복되는 삶, 아침에 7시쯤 일어나 학교로 오고 책을 읽고 영어 모임을 하고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삶의 표면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일기를 통해 발견한다. 하루의 반복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그 속에서 생각하는 것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의 글이 다르고 또 내일의 생각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삶은 여러 의미로 가득 차게 된다.

결국, 의미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인데, 나로서는 이처럼 삶의 단면을 잘라서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며 이는 자신을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구조화된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고 문장을 유려하게 쓰려는 노력을 통해 바른 생각과 마음에 이르게 된다. 펜을 이용해 글을 쓴다면, 글씨를 아름답게 쓰려는 노력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바른 자세와 바른 마음을 정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글쓰기는 생각을 발전시키고 작법 능력을 높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의 경험은 저마다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파헤치는 행위가 바로 경험에 대한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하면 할수록 늘며, 일기뿐 아니라 다른 고찰을 할 때도 이렇게 개발한 능력은 도움이 된다. 더불어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어떤 생각을 발견하였다면 그 생각이 다른 누군가와 대화나 토론을 할 때도 풍성한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글을 잘 쓰려면 해야 할 첫 번째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무슨 글이든 좋으니 글을 써야 하는데, 글쓰기가 익숙지 않은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때도 있다. 수영을 잘하려면, 일단 수영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지, 영법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못하면 사람들이 쳐다보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것과 같다. 다행인 것은 우리는 일반적으로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방법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있으며, 한번 이상씩은 그 방법으로 글을 써 보거나 하다못해 일기라도 써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훈련의 쉬운 방법으로는 자신의 느낌과 경험이 있는 글인 일기로 분량이나 시간을 정하여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글을 계속 써오던 사람은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비교적 익숙하게 시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어떤 사건, 혹은 경험 등의 구체성을 띤 현상에 추상적인 생각을 덧붙이거나 추상적인 생각의 전달을 위해 구체적인 것을 덧붙이기도 한다. 기록물이 아닌 이상 현상만을 기록한 것도 특별한 스타일의 글이 아닌 이상 생각만을 기록한 것도 별로 없다. 구체적인 현상에서 점차 추상적인 생각으로 가든, 추상성에서 점차 구체성으로 가든 또는 그 둘이 한꺼번에 존재하든 양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일기는 자신만의 경험에 자신만의 생각을 녹아내는 것으로 글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른다. 마음에 남는 것은 더 생각하게 되고 알고 싶어 하며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때로는 그 마음속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아픔이나 슬픔 혹은 분노와 같은 감정도 있다. 진지한 글쓰기는 그런 것들마저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고 또 무엇일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유홍준님의 말은 비단 우리의 문화재에만 적용될 게 아니라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적용된다. 글 또는 일기를 쓰는 행위는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화함으로써 실체화한다. 즉 뜬구름 잡는 식이라기보다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헤아린다.

이러한 의미를 알기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며 단기간에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수영장을 등록했어도 물에 몸을 담그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운동하지 않으면 어떤 효과를 못 이룰 수도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고통이 따르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은 그러한 노력과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며 글쓰기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의미가 없다.'라고 여기는 이 친구를 존중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크다.

책을 살 때, 어떤 책을 살지를 미리 생각하거나 사야 할 동기가 생겨서 사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두면 언젠가는 보겠지.’ 생각하며 직접적인 동기나 이유 없이 구매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매하는 책들은 고전이거나 많은 사람이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책이다. 그렇게 구매해 책장에 꽂아두면 훗날 어떤 이유로 눈에 뜨이거나 동기가 생길 경우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

처음부터 목적이나 이유, 혹은 동기를 발견하고 행동을 하는 경우만큼이나 행동을 하고 훗날 그 의미를 발견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할애하는 일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라도 의미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하면, 현대인들의 끝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은 이러한 의미 발견이 무의식적으로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이러한 일 가운데에도 글쓰기는 내가 고전을 구매하는 까닭만큼이나 많은 사람과 전문가들이 그 행위에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므로 해볼 만하다. 분명히 그러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여러 행위 가운데서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하나쯤은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충분한 노력을 하는 자는 비교적 빨리 그 의미를 찾겠고 그렇지 못한 자는 결국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시간 낭비라고 여길 수도 있다. 결국, 자신의 생명인 시간을 소모해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니 이 외의 다른 가치 있는 일을 그 시간에 할 수 있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선택을 하는 게 옳을 수 있다. 이는 누군가가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며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아마 그 친구가 아침부터 생각난 까닭은 학교로 가다가 동아리 창문이 열린 걸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흘러가며 현재는 그 친구가 동아리 회장으로 있기에 연이어 떠오른 것이겠지.




매번 휴대폰의 좁은 화면으로 글을 쓰다가 눈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을 느껴 처음으로 노트북으로 글쓰기를 했다. 휴대폰의 좁은 화면을 붙잡고 있던 까닭은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는 점이었는데, 오랫동안 화면을 보며 쓰다가 보면 글씨가 아른거렸다. 한 번은 윤석이가 왜 그렇게 휴대폰으로만 쓰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좁은 화면이라 집중이 잘 되고 어디든 가지고 다니면서 쓸 수 있고 이와 더불어 타자 속도가 컴퓨터보다 느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쉽게 수긍을 했지만, 마지막에 한 말은 글쓰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했다. 타자 속도가 느린 것과 글을 쓰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전의 글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일전에 어떤 연구에서 작가들에게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만 글을 써보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두 손으로 타자를 하던 작가들은 느려진 속도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글을 썼다. 그리고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오히려 두 손으로 쓸 때보다 더 나은 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연구에서는 그 까닭에 대해 타자 속도를 늦춤으로써 생각할 시간을 더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손으로 칠 경우 타자 속도가 충분히 문장을 생각할 시간을 주지 못하고 생각의 속도를 앞지르는 것이다. 휴대폰으로 타이핑을 하면서 기대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타자가 생각을 앞지르지 않고 서로 보폭을 맞추는 데에 휴대폰 자판을 치는 속도가 적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었으며 노트북을 쓸 때랑 비교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꾸준히 생각하며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휴대폰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휴대폰은 내게 최고의 타자기였으며 생각 정리의 도구였다. 휴대폰이 없었더라면 이처럼 쓸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으리라고 본다. 특히 어디서나 가지고 다니면서 쓸 수 있던 휴대성은 심지어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도 이를 가능토록 했다. 그 덕분에 뭔가가 생각날 때마다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고 버리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김훈이나 조정래와 같은 작가가 연필과 원고지에 쓰는 것을 고수하듯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것이 나만의 글쓰기 방식인 것 같아 기분 또한 좋았다. 쓰는 속도가 느려 생각하기를 오히려 막지도 않고 컴퓨터보다는 못하지만, 수정이 자유로우며 타자를 두드릴 때 나는 소리 덕분에 경쾌한 맛이 있었다.

펜과 원고지로 글을 쓰는 이들 중에는 수정이 지나치게 자유로우면 오히려 깊게 생각하기를 방해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종이에 쓰면 처음부터 틀리지 않을 것을 충분히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인데, 휴대폰의 좁은 화면과 수정에 관해 노트북보다 불편한 점이 펜으로 쓸 때의 불편함이 주는 '충분히 생각하기' 방법을 유사하게 제공한다고 본다. 또한, 휴대폰만의 장점은 아날로그적 느낌은 없지만 느린 속도를 보완하고 그 속도로 하여금 즉흥적으로 스치는 생각을 붙잡을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이다. 또한, 펜이나 연필이 원고지를 지날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큼이나 따딱거리는 소리는 노트북과는 다른 타자기적 감성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지금까지의 유일한 단점은 오랫동안 집중하면 눈이 아른거린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꺼내 들은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로는 ‘과거에도 노트북으로 써 왔는데, 약 3개월 동안 충분히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연습을 해왔으니 노트북으로도 휴대폰으로 글을 써온 것처럼 쓰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뿐 아니라 일기를 제외하고는 독서 발췌에 따른 생각을 적거나 다른 글을 쓸 때에는 노트북을 적극 활용하니 특정 도구를 고수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운이 좋아 출판을 하게 되면 책 띠지에, 오로지 휴대폰을 활용하여 쓴 책이라는 말을 넣고 싶었는데, 그것을 못하는 게 아쉽기는 하다. 여하튼 검은 노트북이든 흰 휴대폰이든 글만 잘 쓰면 되니, 출판에 대한 고민보다도 일단 어떻게든 쓰는 게 중요했다.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글쓰기를 할 때, 또 하나 나쁜 점은 기기의 범용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는 전자책을 보려고 태블릿이 있음에도 e-ink 타입만을 제공하는 이북 기기를 사는 것과 유사하다. 비싼 태블릿이 전자책 기기로 활용하는 데 좋지 않은 까닭은 쨍한 디스플레이뿐만 아니라 태블릿으로는 책을 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까닭에 독서 몰입을 방해한다. 노트북이나 휴대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글쓰기 초보는 더욱 이런 전자기기로 글을 쓰는 것은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휴대폰이 작은 화면 때문인지 혹은 휴대폰을 통한 다른 콘텐츠 소비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몰입이 더 잘 됐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나 글을 쓰고 책을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저녁이어서, 비가 와서, 연필과 종이가 없어서 쓰지 못한다는 핑계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가지고 다니는 이 작은 휴대폰만 있으면 가능하다. 이제는 전화나 문자 메시지 용도로 사용하기보다 글 쓰고 공부하고 책을 읽고 또한 검색의 수단으로써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활용한다. 물론 유튜브 감상 등의 여가 용도로도 빠지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 이러한 휴대폰의 폭넓은 범용성이 오히려 생산적 활동을 저해하기도 하나, 자신이 그런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면 지성의 도구로서 이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선택의 자유가 과도하게 많아진 세상에서 원칙과 규칙은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자기 삶의 원칙과 시간 관리 그리고 휴대폰과 같은 도구의 사용, 심지어 인간관계마저도 원칙과 그에 따른 규칙이 있을 때 선택에 따른 고민을 대폭 줄여주고 소신대로 행할 수 있다.



영어 모임은 오늘 참여자가 없어서 따로 모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저조한 참여 인원으로 하여금 다음 달 모임을 계속할지 계속 고민스러웠다. 모임을 하지 않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 위에서 계속 공부와 복습을 할 터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영어 모임의 시간을 다른 목적을 위해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가령 읽기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든지, 혹은 지금처럼 이렇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아침부터 쉼 없이 글을 써나가는 것도 좋았다. 이 시간이 확보되면,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책을 충분히 읽으면 된다. 무엇이 되었든 나 자신을 지금보다 더 갈고 닦을 방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임의 입장에서도 쉬어갈 시간을 주어 참여자들에게는 기존에 거의 반년 동안 공부했던 것을 총 복습하는 시간으로 두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았다. 여하튼 이 부분에 대해 이번 주 내로 결정하고 통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다녀오고 집을 나오니 3시가 되었다. 월천 라운지로 가서 윤석이를 보고 영어 모임에 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니, 그도 동의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영어 모임마저 그만두면, 지금의 빠듯한 수입 탓에 다른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후 계속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보았다. 아스퍼거 증후군 같은 자폐 성향의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책을 읽으며 문득 박정민, 이병헌 주연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러한 영화를 보면서, ‘이들이 천재성을 가진 것은 인정하나 과연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있었다. 음악은 감정의 영역이었고 감수성은 독특한 삶의 경험이나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체로 자폐 성향의 이들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음악에서도 그저 기계처럼 복사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올리버 색스는 이러한 성향이 있는 실재 인물을 지켜본 결과, 그 생각은 틀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과거에는 나와 같이 생각했었노라고, 그들은 감정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계처럼 복제할 뿐이라고 여겼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실제 그들 역시 음악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방식이 우리처럼 독특한 경험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닐 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재주나 기계적인 기억력이 아니라 진정으로 뛰어난 음악적 지성을 가지고 있다며, "작품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 특히 주제의 전 음계 구조를 결정하는 법칙에 대한 절대적 지식을 지니고 있고 이는 특정 경험에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이 말에 나는 어쩌면 예술에 대하여 좁은 시각과 편견이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험이 중요하며 그러한 경험의 총체가 가치 있는 예술을 만들어 낸다는 전제 속에서 사고하여 그밖에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들의 '창조적 지성'을 이해하려면 좀 더 열린 눈으로 봐야 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러한 편견을 갖게 된 까닭은 그들의 재능에 대한 일종의 부러움, 시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들의 재능은 다른 결핍의 반사 이익이라 여기고 그들이 감정이 없음을 내심 속으로 흐뭇해하는 음흉한 욕망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작가들에게 상당히 많은 영향을 준 책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캐릭터들은 소설적 대상으로 보면 하나같이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두뇌 신경 손상으로 환영을 보는 인물이나 특징이 없는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언어 인식 불능증, 살인을 한 사실을 기억 못 하다가 두뇌 손상으로 원치 않아도 끊임없이 회상하게 된 사람, 자폐 성향이나 위대한 두뇌를 가진 사람 등등…. 기적 같은 인물들은 그 자신은 불행할지라도 영화나 소설 등의 소재가 되기 충분할 정도였다. 단순히 생각만 해봐도, 앞서 말한 '그것만이 내 세상'의 박정민의 캐릭터뿐 아니라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이 떠오르고 귀신이나 환영을 보는 영화, ‘메멘토’와 같은 영화들의 캐릭터도 이런 책에 나온 실제 인물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 책이 원하는 바는 저자의 들어가는 글이나 역자 후기에서도 알 수 있듯, 신기한 인간 정도로 혹은 “한 인간을 병리로써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병마와 싸우며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기술하여 살아 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인간은 질병코드로만 말할 수 없는 복잡함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인간의 투쟁을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은 가령, 이런 것이다. 몇 년 전에 잠깐 스치며 본 드라마 중에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다른 여자들의 외모를 분석적으로 평가하며 등급을 매긴다. 그녀의 세상에서는 그 등급으로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는 분석적으로나 등급으로만 매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그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현실을 마주해왔는지 그 사람의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서사이며 이를 통해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 드라마도 그 안의 서사를 따르면서 주인공이 겪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아마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어떤 희귀병의 증상에 대해 알리는 것보다 희귀병을 앓는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알리는 게 더 많은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그 병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을 조망하게 됨에 따라, "관객은 병리적 기술과 '한 인간의 역사'가 맞물리는 지점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 대중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야기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기를 쓰는 것은 내 역사를 스스로 기술하는 것이니 이는 내 정신의 세계를 바꾸는 행위가 아닐까?

이런 책을 관심만 두다가 이제야 본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독서를 마친 뒤에 그의 다른 책들을 검색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책이 있어서 구매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하나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음 책을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마냥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선택에 따른, 고민이 있고 그 고민이 심할 때는 오히려 속박같이 느껴져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읽기 전이든 읽는 중간이든 어떻게든 읽어야 할 이유를 만들지만, 여전히 내 생명의 시간과 맞바꿀 책을 고르는 일은 제한된 돈으로 값비싼 보석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이따금 숙고가 필요한 선택이다. 이런 중에 이처럼 매력적인 글을 쓰는 저자를 만나면 그다음 책을 고르는 것은 비교적 수월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독서 모임을 운영할 때에는 모임을 위해서 무슨 책을 고르냐가 내가 읽을 책의 선정 기준이 되어서 많은 고민이 필요 없었다. 독서 모임에 관한 도서도 선정 기준이나 참고할 만한 목록이 많아서 선택이 어렵지 않기도 했다. 오히려 지금은 ‘고전 또는 어떤 분야에서 인정을 받은 책을 읽자!’라는 가벼운 원칙 외에는 구체적인 규칙이나 명저 100선처럼 제한된 범위가 있는 것도 아니라 그때보다 제한된 금액 안에서 책을 선택하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뿐 아니라, 오늘처럼 '이 책이 매력적이니, 이 저자의 다른 책을 읽자.'라는 직접적인 이유가 매번 생길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서재와 전자책의 목록을 바라보면서 이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는 까닭은 이미 내게 다가왔거나 혹은 언젠가 내게 다가올 이 엄청난, 읽은 책과 읽을 책들에 눈길이라도 건네 끊임없이 기억의 책꽂이에 저장해두기 위함이다. 그런 행위 자체만이라도 책에 대하여 수많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책을 고르고 읽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책에 있는 지식만을 내 머릿속에 저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책을 구매하기까지의 수많은 생각들, 다른 책에서의 인용, 그 책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교류, 구매 과정상에서의 경험, 읽는 동안의 경험과 느낌, 그 이후 토론이나 생각을 나누던 과정들 모두가 한데 묶인 총체적인 상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올리버 색스가 그 인간의 현재 상태를 알려고 병리학적 접근보다 인간 역사를 이야기를 통해 접근하였듯이 책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특히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 책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던 셈이다. 이는 마치 그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한 부분인 '쌍둥이 형제'에서 그들이 그저 '힐끔 보기'만으로도 바닥에 떨어진 111개 나 되는 콩의 개수와 그것을 인수분해했을 때 나오는 소수를 아는 것처럼 서재를 힐끔 보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총체적으로 상기할 실마리를 얻는다. 그래서 나는 선택의 행위 자체가 다소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그 행위를 중단할 수 없다. 오히려 사소한 고통쯤은 기쁨이라고 여기면서. 이 수많은 책에서 들어 있는 무궁무진하며 멋진 생각들을 받아들일 준비 운동쯤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그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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