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했더라면,|삶은 크고 작은 이야기이다|사소한 농담

나의 일상 여행기. (66)

by Chris
그림: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생 나자르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Arrival of the Normandy Train, Gare Saint-Lazare), 1877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문득 생각한다. 약 27평 내외의 아파트에서 살고 아침에 일어나 사랑하는 아내와 밥을 먹고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서 회사로 출근한다면 어땠을까? 조용한 아침의 공기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큰 양문형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티비를 켜서 뉴스의 한 꼭지를 보는 일이었다면? 먼저 일어나 침대 위에서 포근히 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다면? 그렇게 오붓하게 살다가 주말이면 공원이나 야외로 가족과 함께 차를 끌고 나들이를 하러 갔다면? 명절에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선물을 들고 고향에 갔다면? 그랬다면 난 어땠을까? 문득 이 좁디좁은 방에서 일어나 어질러진 방을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남들이 갖는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있다가 다시 누웠다.

지금의 삶을 불행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친구들처럼 대출로 산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이따금 부러울 때가 있었다. 어느 다중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내가 선택한 삶 가운데 존재할 그런 삶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부러웠다. 지금 나는 오롯하게 나 자신뿐이며 때로는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 같은 마음을 붙잡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지금껏 이 중심 잡기에서 승리해 왔지만, 언제 이 중심이 쓰러질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수년 전의 선택은 점점 더, 어린 시절의 꿈을 아득한 옛날의 꿈처럼 느끼게 했다. 어느 티비에서인지, 혹은 어릴 적 부모로부터 기억하는 추억인지는 모르는 저런 꿈은 이루지 못한 현실이었으며 아득한 옛날의 기억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헬스장에서 돌아가는 저녁 어느 날, 나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마흔 전후로 큰 상을 받고 그때의 소설가가 되기로 한 선택에 대해서 후배들에게 자랑스럽게 강연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저 역시 늦게 시작했다고 그리고 꿈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빛을 보는 날이 있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때 이후로 취업을 위한 자소서 쓰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책과 함께 살았다. 스무 살 시절의 막연한 꿈이었던, '책에 파묻혀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실현된 것이었다. 학과 공부와 수많은 일, 현실의 장벽에 막혀 할 수 없었던 일이 긴 시간이 지나 인생을 선택을 달리하고선,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된 것이다. 하고 싶던 것들을 모두 마음껏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내 시간을 내가 결정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았다. 그때에는 아직은 20대의 젊은 친구들과 큰 나이 차가 나지 않았고 많은 친구와 후배들이 학교에 남아 있었으며, 충분히 앞으로 나의 분야에서 성공하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겪을 평범한 일상이 나의 직업적 성공과 함께 이룰 수 있는 것이라 믿었기에 저 삶을 이룰 수 있고 없음에 대해서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마치 대학에 입학하면 4년간의 남들과 비슷한 삶이 이뤄지듯, 이 또한 그렇고 그러한 삶의 일부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 궤도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

누구나 대학을 들어가는 세상이라고 해도 대학을 들어가지 않은 친구들이 있고 이들은 때로 대학 생활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이 되었던 친구들은 그 나이 때 누렸어야 할 학창 시절의 소소한 즐거움을 부러워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난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삶이 이따금 부러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 자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의 삶은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이런 감정은 단지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할 때 느껴지는 소외감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소외감은 시장기처럼 이따금 나를 찾아와 마음의 허기짐을 느끼게 한다. 집에 더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전날 만들어 놓은 커피를 들고 그 작은 집으로부터 빠져나왔다.




교문을 지나쳐 스터디룸으로 들어와서 앉아서 노트북을 켰다. 휴대폰으로 쓰는 게 좋았지만, 눈이 어른거려 노트북으로 쓰기로 했다. 한참을 쓰다가 메시지가 와서 보니 오늘 영어 모임에 오기로 한, 진규님께서 못 오신다고 연락이 왔다. 잘됐다 싶어 오전 중에 글을 계속 쓰기로 했다. 흐름을 타니 다른 날보다 더 글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물론 「나르서스호의 검둥이」의 서문에 나오는 조셉 콘래드처럼 글 한 줄, 한 줄마다 예술성이 묻어나기를 바라나 이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윌리엄 포크너는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자신은 시인으로 실패해서 단편 소설 작가가 되었고 그마저도 실패해서 장편 소설 작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단지 경제적 성공 여부가 아니라 조셉 콘래드의 말처럼 단어, 문장이 가진 예술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해서 장편 소설 작가가 되었다는 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장편 소설 작가는 단편이나 시보다 서사가 끌고 가는 힘이 더 세지만, 예술성은 그 둘보다 떨어진다고 이해한다면 내 글에도 조금은 면죄부를 줄 수 있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이 글이 하루의 시간을 되돌려 시간의 순서대로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이듯,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더듬어 하루라는 시간 동안에 끝없이 넓은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으면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글이 동기가 되어 자신의 일상을 적는 글쓰기를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글쓰기의 장점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말한 바 있으니,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혹자는 글쓰기의 필요성을 느껴도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데, 자신의 일상을 더듬어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많은 소재를 제공한다. 가령, 하루를 내딛는 첫 발걸음조차 의미를 두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최초로 달을 밟은 닐 암스트롱만이 의미 있는 걸음을 한 것일까? 자신이 처음 살아보는 오늘의 첫 발자국은 달을 밟은 것만큼이나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당신의 걸음이 인류의 거대한 도약은 아니지만, 오늘을 사는 자신의 거대한 도약이 될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오늘 본 광경은 처음 살아보는 오늘이라는 점에서 특별해질 수도 있다.

책을 읽는 게 자신의 정신을 살찌우는 것이라면 글을 쓰는 것은 운동에 비유할 수 있다. 다소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건강한 생각을 만드는 데에 필요하다. 또한, 삶이 아니라 작가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령, 무궁한 소재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의 독특한 부분만을 모아 짜깁기하면, 그 자신이 돈키호테적인 인물로 보일지 누가 알겠는가? 혹은 그 많은 의미가 되는 소재 중에서 탄탄한 소재를 발견해 자신만의 문학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것이긴 하나, 이 글이 그러한 직업에 맞는 글일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서도 새로운 시도이나, 처음부터 이런 방향으로 글을 써봐야겠다 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한 기록으로 시작했다가, 제임스 조이스의 하루 동안의 일상을 기록한 책과 프루스트의 과거에 대한 추억의 일상을 기록한 책이 떠올라 매일 별반 다를 바 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서사적으로 기록해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으로 쓰게 된 것이 바로 지금의 글이다.

이를테면 나는, 하루라는 시간 동안의 일상을 돈키호테적으로 여행하고 있던 셈이다. 거대한 저 건물을 보고 비록 거대한 풍차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거기에 어떤 의미를 두고 상대하며 고작 집과 학교, 일터 이 세 곳에서 매일 다른 여행을 떠난다. 어리석은 나는 지금껏 제대로 된 여행 한번 하지 못했으나 어떤 의미로는 이 순간 누구 못지않은 여행을 하는 셈이다. 이곳은 이따금 보이지 않는 여러 유령도 배회하는 세상이다. C.S 루이스는 글로써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나 역시 글을 씀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셈이다.

영어 모임 동안 계속 글을 쓰면서 오히려 아침부터 써야 할 글을 쭉 쓰는 게 마음 놓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충분한 분량을 쓸 수 있었고 글을 쓰다가 오후에 책을 보지 못하게 될 때 느끼는 조바심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다음 달부터는 이 모임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을 하다 보면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게 아니다. 특히 마음이 잘 맞거나 호감이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더욱더 그렇다. 물론 이들 또한 언젠가 떠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행여나 이들과 어떻게 관계가 잘 이어져 인연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그저 사람이 그리울 때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친목 모임을 만들어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영어 공부라는 내가 좋아하는 목적이 있고, 이를 통해 용돈이라도 벌기에 더 애착하는 것도 있다. 여하튼 끝은 언제나 있으며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그것이 영어이든 무엇이든 변화를 주어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계속 글을 쓰고 있는데, 교육이 있어 울산으로 내려간 대용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울산 내려가는 길에 차가 고장 났다는 이야기, 오토바이를 타기 좋은 날씨라는 이야기, 개인택시 아저씨랑 나눴던 카카오 택시 플랫폼 이야기 등등,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삶에 특별한 이야기가 얼마나 있겠는가? 오히려 이런 소소한 이야기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총체이다. 그것이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이 되느냐 또는 보통의 삶이지만, 그렇다고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이 되지 않느냐는 그 삶에서 율리시스적인 여행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삶의 이야기, 그것이 누군가의 이야기이거나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머릿속에서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풀어낼 때 가능하다. 의미로서, 형식으로서.

단순한 삶을 단순한 형식으로 엮기보다 자기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엮어낼 수 있을 때, 그 형식도 의미 일부가 되며 다시 그 의미는 보통의 삶을 특별한 삶의 기억으로 보상한다. 우리의 삶을 시나 노래처럼 불러보기도 하고, 연극적으로 꾸며보기도 하고, 소설이나 영화의 플롯처럼 구성해보는 것도 단조로움을 피하는 방식이다. 단조(minor key)로 이루어진 음은 우울할 노래의 가사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 가사를 내용이라고 한다면 단조의 음률은 형식이며 이 둘이 겹쳐져 그 가사가 전하는 의미를 극대화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단조로운 삶도 그러한 의미와 음이 있으면 특별해질 수 있다.



대용은 개인택시 기사 아저씨가 카카오 택시가 콜을 받을 때 출발, 목적지가 다 나오고 내비게이션으로 안내하며, 심지어 결제로 앱으로 등록된 카드로 자동 결제가 되어 자신은 운전만 해서 좋다고 했다고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대해 잠시 생각을 했다.

4차 산업 혁명이 실제로 도래하는 건지 혹은 그저 주장일 뿐인지 아직 알 수는 없으나, 지금 시대의 눈에 띄는 큰 변화를 이야기하자면, 카카오 택시와 같은 플랫폼 사업일 것이다. 개인과 개인 간의 거래가 아닌 중간에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를 한 번에 이어주며 심지어 지불마저 플랫폼에서 거래되는 것은 비단 택시 사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일상의 거의 모든 거래에서 이용되고 있다. 아마 앞으로 거의 모든 것들이 이런 단계를 거치거나 혹은 사업화될 것으로 여겨지는데, 저녁에 친구들과 먹은 배달 서비스도 그러했다. 예전처럼 서비스 제공자를 만나 서비스 비용에 대해 협의할 필요도 없고 상대에 대하여 비교적 투명한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러한 서비스는 서비스를 받을 때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해준다는 점에서 획기적일 수 있었다.

산업 혁명을 이야기할 때, 어떤 산업이나 기술의 발달과 동시에, 커다란 사회 변화도 함께 맞물려 작용한다고 한다. 산업 혁명 당시의 시민혁명 등을 통한 의식 개혁이나 노동력의 거래 대상화, 토지의 거래, 상품 화폐 발달 등에 맞물린 자본주의 경제의 대두 등도 그러하다. 4차 산업 혁명에서는 어떤 사회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플랫폼 사업이 어떠한 사회 변화를 가져올까? 유튜브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고, 아직은 시기상조인듯하나, 국가의 통제를 넘어서 전 세계인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한 가상화폐나 플랫폼을 통해 서비스 공급자와 구매자를 1:1로 이어주는 서비스들이 플랫폼의 '공유'라는 이름에서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거와 차이점이 있을까? 과거의 콜택시도 택시 서비스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를 이어주는 플랫폼 구실을 하는 업체가 별도로 있었고 이 둘을 연결해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서비스를 받으려면 플랫폼 담당과 통화를 하고 서비스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수요자가 투명하게 알 수 없었으며, 이용자로서는 서비스 제공자의 정보를 알기에도 어려웠고 공급자로서는 서비스 수요자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서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중간자, 플랫폼 역할을 하는 업체가 다양하며 저마다 서로 다른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도 서비스와 서비스 공급자, 수요자 간에 신뢰를 쌓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카카오 택시는 강하고 안정적인 플랫폼 위에서 택시 서비스 제공자와 수요자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서로 투명하게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점이 최대의 강점이 아닐까 싶다. 즉 서비스의 공급자나 수요자가 이를 통해 신뢰할 수 있도록 플랫폼이 보장하고 있다. 공급자는 수요자가 어느 위치에 있고 어디까지 가는지를 알 수 있다. 수요자는 마찬가지로 지도 상의 가장 가까운 위치의 공급자를 호출할 수 있으며, 그의 정보를 알 수 있고 심지어 거리에 따른 비용이 얼마인지도 미리 알 수 있다. 기존에는 감추어져 신뢰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모두 플랫폼 상에 드러나고 눈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신뢰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 최대의 강점이 아닐까? 물론, 약점도 있을 것 같은데, 가령 콜택시의 중계자가 컴퓨터가 아니라 택시 운전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며 그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데에서 신뢰할 수 있지만, 그 중계자가 오로지 시스템이라면 아무래도 택시 기사의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음에도 오히려 불안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과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의 구매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정보의 부재로 신뢰하기 어렵거나 의심이 가는 부분에 대하여 소비자가 분산된 정보들을 찾아 조합하거나 직감으로 처리해왔다. 플랫폼의 공유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는 바로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 보이지 않아 의심스러웠던 영역이 투명해져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안에는 A.I 등의 4차 산업 혁명의 핵심이 되는 기술이 '공유'와 '플랫폼'의 이름으로 소비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적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사회에서 이에 부응하는 사회적 변화의 키워드는 '신뢰'에 따른 편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택시나 배달 사업뿐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 가능하며 실제로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게 4차 산업 혁명에 따른 변화의 주요한 특징일지는 알 수 없으나 커다란 변화는 맞는 듯하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글쓰기를 마쳤다. 식사하고 집에서 잠깐 쉬고 있으니 상윤이가 왜 안 오냐고 연락이 온다. 간단하게 짐을 챙겨 월천 라운지로 향했다. 새롭게 볼 책으로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스피노자의 뇌'를 골랐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올리버 색스의 책을 보고 뇌과학에 다시 관심이 가서 집어들었다. 색스의 책이 인지에 관한 뇌의 신경학적 접근이라면, 이 책은 느낌에 관한 뇌 신경학적 접근이다. 색스의 책이 인지 문제를 겪는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면 이 책은 보다 학술적이며 뇌신경의 자극과 이상이 사람들의 느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힌다. 그래서 교양서이기는 하나, 전문적이고 어렵다. 또한, 전자의 책에서 색스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실제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면서 글을 쓰지만, 후자의 책에서는 그것을 부정하며 오로지 육체의 자극에 따른 신경의 반응으로 여긴다.



자리에 앉아 이 책을 펼쳤지만, 오전에 너무 집중했는지 피곤함이 밀려왔다. 더군다나 집에 만든 콜드브루 커피를 마시니 심장 박동도 증가하는 것 같았다. 결국,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왔다. 간만에 예전에 캘리 그래피 동아리를 함께 했던 애들로부터 연락이 와서 동아리 방에서 모여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다른 어린 친구들보다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나이 많은 친구가 배달 앱을 이용하면 할인 쿠폰을 준다고 하여 우리는 이것을 이용해 주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친구나 나나 주문 앱을 다뤄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을 거듭 실패한 끝에 쿠폰은 적용도 못하고 결국 그냥 주문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오히려 전화로 하는 게 더 빠른 해결책이었다. 이 앱을 통한 플랫폼 경제가 발달하려면 기존의 것을 버리고 배우는 법을 감수해야 할 텐데, 우리는 적용하지 못했지만, 처음 사용자를 위한 할인 쿠폰은 그 진입 장벽을 낮춰주었다. 물론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짜증을 내지 않게 쉽게 사용토록 하는 것도 관건일 터였다.

여하튼 간만에 그곳에서 친구들과 모여 자장면과 탕수육, 그리고 떡볶이를 즐겁게 먹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그곳에 발도 들이지 않다가 올해 처음으로 그 장소를 방문했다. 그동안 변한 건 별로 없었고 내가 두었던 물건도 그대로 있었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끼리는 예전보다 더 가까워진 듯하고 나에게는 예전보다 조금 더 깍듯하게 대했다. 우리는 먹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연애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누군가와 헤어진 이야기, 헤어지고서 술을 마시고 고생했던 이야기, 새롭게 누군가를 만난 이야기, 아직도 못 잊는다는 이야기 등등. 사랑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지, 마치 오래전에 지나간 추억을 말하듯 웃으며 반쯤 농담을 섞어 이야기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혜원이 술을 마시고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다가 토를 한 이야기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혜원은 캘리 그래피 모임이 끝나고 최근에 남자친구와의 이별한 기억이 떠올라 술을 진탕 마셨다. 그리고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도중 갑작스럽게 토를 뿜었는데, 그 앞의 한 남성의 바지 끝단에 자신의 토사물이 묻었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죄송하다며 세탁비 배상하겠다고 했지만, 남자는 연락처를 남겨주며 술이 깨면 연락 달라고 했다. 다음날이 되어서 연락을 했더니, 남자는 세탁비는 됐고 커피 한 잔 같이 하자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미모가 아직 안 죽었다고 깔깔댔다. 우리도 그때 그녀가 뿜었을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이야기들을 농담에 섞어 사소한 일로 만들려는 이들의 마음을 안다. 그 안에는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술 한잔 기울일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억이고 이별의 아픔이었다. 그들에게는 서글픔이겠지만, 나는 이렇게 사소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사랑의 옛이야기가 있다는 게 부럽다. 사실 이들의 나이가 부러운 까닭은 나이 자체에 있다기보다 저 나이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연애를 말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학교라는 특정한 나이대의 친구들만이 주축이 되는 공간에서 있노라면, 나는 내 나이의 또래를 결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들과 연애를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차이가 났다. 상관없다고? 자신감 없는 내게는 적어도 상관이 있다.

내 앞에 있는 이 친구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녀의 사소한 웃음에도 나는 행복해진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이러한 그녀에게 내 감정을 말하고 이 관계를 깨뜨릴 수 있을 만큼 자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은교를 동경하는 이적요에 지나지 않는다.

이따금 이러한 나의 강한 에고를 깨뜨리고 싶다. 심지어는 꿈에서조차 나의 사랑과 성적인 판타지는 이루어지지 않고 강한 도덕률에 묶여 자포자기한다. 사랑에 관한 나의 욕망은 그렇게 묶이고 시간이 갈수록 강화된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사랑에 대하여 침묵할 뿐이다.

나 역시, 강렬한 사랑을 하고 싶고 또한 주고 싶다.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불꽃을 누군가에게 심어주고 싶다. 그러나 불꽃은 지금도 침묵할 뿐이다. 나는 사랑에 관하여 할 말이 없으며 단지 동경만을 할 뿐이다. 만약, 그 사랑이 있었더라면, 난 약 27평 내외의 아파트에서 살고 아침에 일어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밥을 먹고 넥타이를 매고서 회사로 출근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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