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여행기. (68)
그림: 에곤 쉴레(Egon Schiele), 포옹(Embrace 「Lovers II」), 1917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170x100cm /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 ※ 바타유의 애로티즘을 떠올릴 수 있는 그림으로 올림.
전날에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샤워실로 향했다. 불을 켜게 되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바로 침대에 누웠다. 뭔가 아직 못한 남은 게 있지 않으냐고 내 무의식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서인지 전과 다르게 아침에 비교적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에 어김없이 한번 깨기도 했지만, 일어났을 때 피곤함은 그다지 없었다. 심지어 다른 날보다 일찍 집을 나서서 뛰지 않아도 됐다. 온라인 기상 모임에 메신저로 기상했다고 인증을 보내고 스터디 룸의 자리에 앉아 자판을 두드렸다. 방 안의 공기가 조금 추워져 바깥의 정수기 쪽으로 가서 커피 한잔을 받아두고 다시 돌아왔다. 적막한 방 안에서 에어컨 돌아가는 소음만 들리고 간간이 옆방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적막감이 싫어서 휴대폰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하고 감미로운 재즈 음악을 틀었다. 음악이 들리자 방안의 무거운 공기도 제법 견딜 만했다.
전날의 환불 업체 사장과의 통화가 생각이 나서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뭔가 화가 나거나 혹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혹은 감정을 표출하게 될 때 심장이 요동쳤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자고 다짐해도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있었나 싶었다. '마음을 편하게 먹자. 굳이 스트레스받을 일 없다.'라는 생각으로 심호흡을 한번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 상태인데 혈압을 높일 필요는 없었다.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면 당사자들끼리 협의하지 말고 중재자를 통해 해결하는 것도 방법도 있었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을 버텨야 하므로 되도록 원만하게 협의하여 이른 시일 내에 싶었다. 그것을 알아서일까? 그 사장은 자신이 화가 났음을 보이는 표현을 곧잘 했다. 듣고 있노라면 화가 치솟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그냥 법적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렇게 심장이 두근대고 분노한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는 눈앞에 있으면 정말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얼굴을 직접 보자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말로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만나서 해결합니까?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라고 했지만, 도리어 내가 보고서 분노를 못 참아 해코지하게 될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분쟁이 생겼을 때 화가 난 당사자들끼리 협의하는 것이 그리 좋은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치솟으면 욕이 절로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어떤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욕이 실릴 때가 있었다. 아마 분노가 공격성을 띠고 욕으로 표출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욕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공격적 성향이 강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약속은 못 지킬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당당히 말하는 어이없는 환불 업체 사장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이때, 무의식적으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바타유의 글에서 저러한 문장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금기였다. 금기라는 것을 깨질 수 있음을 전제하고 만든 것이라고 했던가? 오래전에 봐서 가물가물하나 말하자면, 쉽게 깨질 수 있기에 도덕을 넘어 사회적으로 금기화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떠올라 당혹스러웠다. '약속은 깨질 수 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이 말에 긍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약속을 못 지킬 수 있다. 그의 말대로 아버지도 약속을 못 지킬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우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에 따른 사과와 해명이 우선이 되고 다음 약속을 다시 잡아야지, 그처럼 막무가내식으로 따지면 누가 그를 신뢰하겠는가? 이렇게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는 다음번에도 또다시 그럴 수 있다는 의심이 생기며 이러한 의심으로 다툼이 또한 스트레스가 된다.
신뢰 사회 구축이 되면 사회적 비용이 감소한다고 한다. 신뢰가 없어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안전장치에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으며, 거래 당사자 간에 의심으로 생긴 스트레스로 감정적으로 소비되는 보이지 않는 비용들도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엊그제 말한 미래 사회의 키워드라고 생각했던 '신뢰'에 대한 프로세스 구축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기야 분쟁 자체가 서로 간에 신뢰가 깨져서 발생하는 것일 텐데, 거기서 합의 시 '신뢰' 프로세스를 둘 당사자 간에 구축할 수 있을까? 다만, 현재의 플랫폼이라 할 수 있는 분쟁 조정 위원회나 공정 거래 위원회를 보면 마치, 카카오 택시 앱 이전의 콜택시 중계를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분쟁 과정을 바로바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서면이나 전화를 통해서만 일이 진행된다는 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분쟁에서도 앱을 통해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떤 게 될까? 감정적 싸움에 분쟁 꺼리는 당사자 간 조율과 합의가 필요한 것이라서 어려운 것일까?
앱을 생각하다 보면 나도 앱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한 세계를 놓친 느낌이다. 요즘에 '트랜드를 따라가려면 새롭게 시도를 해봐야 하나?' 하는 게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앱 만들기이고 또 하나는 유튜브이다. 앱은 개인 사업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용도로, 유튜브는 내 장점을 활용하여 독서나 혹은 지금까지의 코칭이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유튜브는 지금 당장 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편집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과 아직 그 의지가 뚜렷하게 없다는 점 때문에 시도를 못 하고 있다. 맛보기로 상반기에 파이썬을 조금 다뤄봤으나 앱을 만들려면 자바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앱 만들기, 유튜브, 기타 치기, 버스킹, 프로그래밍, 언어 등등…. 그 모든 것을 못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글쓰기이다. 내 미래의 직업으로서 글쓰기에 시간을 바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압도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시간을 책에 바친 것이 이제는 글을 쓰는 데에 바치게 되었다. 글을 쓰는 데에 점점 더 오랜 시간을 들일수록 그 애착이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과거 책 읽기를 사랑할 때,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독서 모임을 했던 것처럼 글쓰기 모임을 주도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려운 글쓰기 말고 그저 이런 일상을 기록하는 방법에 대한 글쓰기로 말이다. 개요를 짜고 구조를 완성하는 글쓰기, 충분한 정보를 습득하고 고찰을 해야만 하는 글쓰기도 좋지만, 그저 이렇게 생각의 흐름을 차분히 따라가는 글쓰기 방법을 알려준다면 좋아할까?
내 안을 들여다보는 치유적 글쓰기로서 이 방법은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건 모두가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 경기로서 배드민턴을 하는 것도 있지만, 선선한 저녁 어느 날에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나와 가볍게 치는 배드민턴도 있듯이, 프로로서 글쓰기를 치열하게 해야 할 경우도 있지만, 아마추어로서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글쓰기도 있는 것이다. 평가받는 글쓰기가 아니라 그저 머리의 근육을 가볍게 풀어주고 선선한 저녁 하늘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될만한 자기만의 글쓰기라고 여긴다면 누구든 글쓰기를 편하게 쓰지 않을까?. 한 친구는 내게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저 일상을 기록해보고 익숙해지면 무엇이든 하나의 대상을 잡아서 써보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어렵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글쓰기의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초, 중, 고 시절에 글쓰기를 배워본 적은 없었다. 우리 또한 대회에 도전하면서 혼자 글쓰기 훈련은 해봤어도 누가 알려주지는 않았다. 대학 시절에 와서야 글쓰기 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을 배우고 전공과 관련하여 글을 써보지, 마치 저녁나절의 배드민턴과 같은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이런 친구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일단은 그저 일상 가운데 떠오르는 것을 적고 그것을 보면서 이어지는 생각들을 적어 나가라고 해주고 싶다. 개요를 짜서 쓰는 것도 좋지만,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을 접어 써 내려가다 보면 글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치 우리가 대화할 때, 특정 목적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대화하는 예도 있지만, 일상의 대화는 사소하게 떠오른 생각으로 말미암아 이야기의 꼬리를 이어가듯, 그렇게 글을 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나의 취미로서, 소소한 행복으로서. 그 정도는 아침의 한두 시간 정도면 충분하리라.
영어 모임을 중간에 다음 달 모임은 어렵겠다고 말했다. 아마 다음 달에 자기도 못 할 것 같았는지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눈치이다. 다음 주 중으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고 모임을 시작했다. 다음 달이면 아마 이 시간이 계속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오전의 긴 시간을 쭉 쓸 수 있는 게 기분은 좋지만, 한편으로 모임이 없어지는 게 아쉽다. 물론 다음 달이 지나고 그다음 달에 다시 모임을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3년 가까이해 온 모임이라 잠깐 쉬는 것이라고 해도 아쉬움이 생긴다. 쉬는 기간에는 그간 공부했던 것들을 다시 복습하고 좀 더 효율적인 방식의 영어 학습을 개발하고 싶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앞으로의 모임은 돈이 될 법한 모임으로 발전시키길 원한다. 지금의 사정 가운데에는 투자 대비 이득이 안 나오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의 학습으로 시작한 모임이지만, 이제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매일 하루에 적어도 4시간 이상을 투자할 의미가 없어진다. 영어 모임이 끝나고 가격 파괴 분식집의 이모네에서 식사했다. 요즘에는 조금 바쁠 때에 가서 설거지라도 도와줄 수 있어서 좋다. 매번 얻어먹는 것도 죄송했는데, 그래도 시급으로 따지면 정당한 대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모도 내가 막무가내로 도와주니 이제는 바쁠 때 도와주는 것을 오히려 반긴다.
2시쯤이 되어 집에 들어가 간단히 양치하고 다시 환불 업체에 연락했다. 이 시간에 나더러 다시 전화하는 말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지만, 빨리 해결을 보든 민사를 진행하든 오늘 제대로 결판을 볼 참이었다. 전화를 거니 사장이 받아서 내일 오전 중으로 넣어준다고 한다. 나는 다음 주 월요일까지 넣어달라고 실랑이를 좀 하다가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다음 주 금요일까지 넣어주기를 원하면 대신 분쟁위 측에 연락해서 공증할 수 있는 서류를 업체 쪽으로 보내 달라고 하려고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넣어준다는 말에 조금은 놀랐다. 사장은 대신 입금 전에 연락할 테니까 화물 위에 제품을 싣고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아니, 한번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설령 돈을 보내줄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화물을 싣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따졌다. 그랬더니 물건 상태가 이상이 있는지 점검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물건을 싣고 가서 거기서 점검할 것 아닙니까? 돈도 보내줄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에서 화물 업체를 부르는 게 말이 됩니까?" 막 따지자, 할 말이 없었는지 좀 실랑이하다가 저번처럼 무작정 끊어버렸다. 이성의 끈도 끊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로 생각하고 어머니 계좌 번호가 적힌 문자를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 몇 가지 어이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어떤 통장으로부터 초기에 해당 업체로 입금했는지 알려고 확인한 결과 돈이 180만 원이 아니라 186만 원이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로부터 한번 물어보았지만, 잘 기억하지 못했다. 여하튼 더는 왈가왈부하기 싫어서 180만 원 보내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이 일도 슬슬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내가 알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약 2달여 기간에 실랑이해온 일이었다. 그 기간에 전화 통화로 받은 스트레스나 억울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문의하며 버린 시간으로만 따져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민사 소송까지 갈 수도 있으니 조금은 더 느긋한 마음으로 법에 의지하여 진행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오기 전에 나자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의 일을 겪으면서 증거 확보의 중요성과 법으로 해결하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번의 경험이 의미가 있는 것은 통해 민사 이전에 이루어질 수 있는 프로세스를 배웠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다시 겪을지도 모르는 다른 민사와 관련된 일에 대하여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삶에 발생하는 모든 위기와 그의 대처는 그 자체가 커다란 배움이다. 이 배움은 앞으로 일어날 비슷한 일을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지만 그러한 큰 위기를 미리 피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전문가의 가장 큰 자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문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큰 위기를 잘 알고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통화가 끝나고 오전에 못다 한 일기를 마저 썼다.
이것이 내게 커다란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잘하는 것인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 돈을 버는 것이 현실적인 일일까? 지금의 나는 돈이 없어도 행복하고 글을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낭만주의를 고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희열의 말대로 연극은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따금 이 일이 어쩌면 나의 가면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힘들게 한다. 이게 만약 연극이라면 많은 사람이 봐주는 연극이 되어야 할 때였다.
마저 글을 쓰고 나니 저녁이었다. 입맛은 없었으나 뭐라도 먹어야 일을 할 것 같았다. 집 앞 가게에서 브리또를 하나 샀다. 밥 먹을 시간이 지나서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브리또를 먹으니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져 라면을 하나 더 끓였다. 젓가락이 어디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그릇을 들고 수저로 들이키듯 먹었다. 어딘가 숨어 있을 젓가락을 찾는 게 귀찮았고 그저 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행동했다. 숟가락마저 없었다면 아마 국물을 조금 마시고 다른 그릇에 따라 두고서 그릇을 기울여 면을 그냥 들이켰을 것이다. 그렇게 임기응변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홀로 좁은 방에서 갖춰 놓은 것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삶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정리도 되어 있지 않아 온화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복잡하게 어지럽혀진 삶은 언제까지일까? 정리가 안 된 방을 그대로 두고 나는 불을 끈 채로 밖으로 향했다. 내 쉼터에서 도망치는 것만이 이 방의 자석 같은 무기력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