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애와 '당연히 알겠지' 심보|사라진 것에 관한 슬픔

나의 일상 여행기. (70)

by Chris
그림: 임종을 맞은 카미유,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79년, 캔버스에 유채, 90×68cm, 오르세 미술 관.|※ 잊혀질 수 있는 것은 비단 나의 글 뿐이 아니다. (그림은 모바일로 보시길 추천.)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두 달 이상 매일 기록을 하다 보니, ‘그 기록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불완전한 저장이나 어떠한 기술적 문제로 하루에 최소 6시간 이상 쓰던 글들이 사라지게 되면 그 상실감은 어떠할까? 한 인간으로서 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이 작업에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두뇌에 있던 기억을 끄집어 올려 기록으로 남겼건만, 마치 치매나 기억 상실처럼 사라지게 되는 게 아닌가? 차라리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마저도 기억할 수 없다면 괜찮겠지만, 내가 소실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느끼게 될 터였다. 온갖 잊혀지는 것들을 떠올릴 때 느끼는 슬픔은 바로 이러한 것과 비슷할 터였다. 아침부터 이렇게 우울한 말로 시작한 까닭은 어제 쓴 글을 그렇게 잃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드라마를 저녁에 보다가 나도 모르게 피곤함과 편안함에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선선한 에어컨 바람과 가벼운 여름 이불이 살갗에 닿아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니 9시가 다 되었다. 동생은 이미 일어나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축구 게임을 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동료 한 명이 자기가 이 게임으로 진 적이 없다고 자랑해서 코를 눌러주려고 연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모니터의 다른 쪽에서는 그가 자주 보는 유튜브 게임 방송을 틀어놨다. 조금은 시끄러운 유튜버의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나도 누워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감상했다. 그의 집이 좋은 까닭은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생각이라는 게 안 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며 사는 데에 따른 피곤함을 더는 데에는 동생의 집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시간이 되면 동생은 밥을 챙겨주고 그저 누워서 잠을 잔다고 해도 뭐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하루의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으며 이 공간은 나른함과 편안함과 그리고 행복감이 평상시의 긴장으로 쌓인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곳이었다. 내게 이곳은 한 주간의 피로를 덜어주는 사우나와 같은 곳이었다. 그저 생각 없이 바라보기만 하면 되고 필요하면 요구하면 이뤄지는 세상이었다. 이를테면 호캉스였다. 배고프면 휴대폰 앱으로 주문하여 시켜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는 곳이었고 따로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재미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비적 행태에 때로는 동생에게 사치하지 말자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 말을 들을 동생이 아니었다. 주말을 이렇게 보낼 권리는 그에게 충분히 있었으며, 특히 가끔 오는 나를 대접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크게 부담되는 일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염없이 착한 그런 동생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는 없어서는 안 될 내 동생이며 영혼의 동반자이다.

때로는 돈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하지만, 어쩌면 돈의 결핍으로 가족애를 조금 더 느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진 게 없으니 가족끼리 똘똘 뭉친다랄까? 가족애를 생각하면 나는 남극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똘똘 뭉쳐 휴식을 취하는 펭귄 가족이 떠오른다. 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까닭은 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함이며 그들 혼자서는 절대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우리 가족이며 내가 지켜야 할, 그리고 나를 지켜줄 존재가 우리 가족임을 알기에 가족애를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가족애 가운데에서도 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그 무엇보다 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해주고 싶으며 동생 역시 그럴 것이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믿는다. 물론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과연 없을까? 그건 그 사람이 충분한 돈이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가 흔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랑, 우정, 도덕 뭐 이런 것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며 거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들이다. 내게는 돈이 넉넉지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적어도 돈을 보고서 접근하는 우정이나 사랑은 없는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내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비교적 의심 없이 대하고 아끼려고 노력하는 까닭은 이들이 나를 돈 때문에 접근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돈이 없으니, 다른 애들처럼 해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을 보일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따뜻한 말 한마디, 편지, 캘리 그래피, 노래부터 동영상 만들어주기, 작은 선물 등. 그냥 선물보다 진심을 담을 수 있는 것을 주려고 노력하는 까닭 한쪽에는 바로 내게는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미안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 엄마가 "널 그렇게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또는 아버지가 "네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도록 못 해줘서 미안해."라고 말했을 때, 느꼈던 그 벅차오르는 사랑의 감정과 고마움은 내 마음의 중심에 남아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도 그러한 감정으로 대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비록 내가 가진 것은 없어도, '나는 너를 생각한다.'는 마음은 사랑이나 우정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속성이며 이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최선을 다해 살펴야 할 부분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당연히 알겠지.' 하는 마음에 쉽사리 놓쳐 버리는 것도 이것이며, 마음이 식을 때 상대방에게 피부로 느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내 동생에게 너무 받기만 해서 혹시 내가 이러한 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정작 나 자신은 그에 대한 애뜻하고 미안한 마음을 '당연히 알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게 기본이라고 여기면서도 동시에 매번 지키기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워서 그렇게 한참을 휴대폰을 보다가 동생은 내게 뭘 먹고 싶냐고 묻는다. 딱히 생각도 없고 돈 쓰기가 미안해 그냥 집에 있는 밥과 라면으로 때우자고 말한다. 그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는 눈빛으로 재차 된장찌개인지 김치찌개인지 묻는다. "알아서 해."라고 하니, 그것도 못 고르냐는 식으로 되묻는다. 몇 번의 실랑이 속에서 동생은 마지못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음식을 고른다.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비싼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음식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 먹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동생은 먹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지만, 나는 먹는 것에 돈을 쓰는 게 아까웠다. 한 끼 정도 라면에 밥으로 때우면 지금 주문한 돈에서 최소 8천 원가량은 아낄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그만큼의 돈을 한 끼 식사로 쓸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가치관이 다르니 그렇겠지만, 그 돈으로 책을 산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몸의 양식과 마음의 양식 양쪽을 살찌우는 것일텐데…. 물론 매번 라면으로 때울 수 없지만, 적어도 한 끼 정도는 아끼면 그걸로 최소 일주일은 채울 마음의 양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사지 말라고 웃으면서 말하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대용도 그렇게 말하고 동생도 그렇게 말한다. 그 말에 나는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다. 얼굴로 그저 웃음 지을 뿐이다.

점심을 먹고 한참을 다시 뒹굴뒹굴하는데, 동생은 미리 짐을 싸준다. 할인 기간에 잔뜩 사놓은 햇반 가운데 한 세트와 내가 수리해준다고 말한 키보드와 그 밖의 소품들이다. 칠칠찮은 내가 매번 한두 개씩 놓고 가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이제 슬슬 내 삶과 다른 시간이 흐르는 방에서 떠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몸을 일으키고 미지근한 물에 샤워했다. 낮 동안 몽롱했던 정신이 좀 깨는 것을 느끼며 지금 가야 저녁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니 동생이 한숨 자고 있다. 전처럼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니 동생이 일어났다. 좀 더 자라고 말했지만, 정류장까지 바래다준다고 기어코 옷을 갈아입는다. 뭔가 좀 더 있고 싶은 마음, 가기 싫어 짜증 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일어나야 했다.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면서 휴대폰으로 그 공간에서 있었던 즐거운 기억을 되씹으며 글을 썼다. 머릿속에서는 전날에 본 영화 '기생충'의 몇몇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특히, 장면에 등장하는 수많은 공간에 대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특히 동생과 함께 있으면서 느낀 집에 대한 관념과 영화에서 나오는 집에 대한 관념이 겹치면서 좋은 집의 기본 조건에 대해 생각을 하게 했다. 함축하면, 햇살과 풍경과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랄까? 충분한 햇살이 들어야 하고 마음을 안정시킬 좋은 풍경이 있어야 하며 사람이 존재할만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인천까지 가는 내내 서서 가야 했기 때문에 글을 다 쓸 수는 없었지만, 그 시간 동안 휴대폰으로 쓴 양치고는 꽤 많은 양이었다. 생각은 계속 이어져 집에 들어와서도 계속 쓰게 되었다.

다 쓰지 못한 글은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마저 쓰자고 생각을 했다. 아직 전체의 반절도 쓰지 않았을뿐더러, 간만에 동생 집에 있었던 일을 쓰는 글이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더군다나 영화 '기생충'을 본 날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나마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일이 끝나고 빨리 글을 쓰고 싶었다.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기생충'의 은유가 아니었고 내가 생각한 전개와는 달랐으며 마지막은 조금 더 극적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경험한 슬픈 일들이 영화에 잘 반영되어 있어서 그에 관해서도 쓰고 싶었다.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니 저녁 10시가 조금 넘은 상태였다. 출출한 김에 치킨집과 편의점에 들러 치킨 반 마리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마시면서 슬슬 글을 쓰려고 휴대폰을 열었다. '한, 두 시간 정도 더 투자하면 충분히 다 쓸 수 있겠지.' 생각하며 메모장은 열었지만, 어디에도 오후에 쓴 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혹시 다른 곳에 저장해 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다른 앱을 열어봐도 없었다. 황당할 노릇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봤지만,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을 쓴다고 몇 시간을 고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화가 나고 미칠 노릇이었다. 입에서는 욕이 절로 튀어나왔고 몇 번이나 침대를 세차게 두드렸다. 계속 이건 아닐 거라고 부정을 해봤지만,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잊자.'라고 생각을 했지만, 어제 하루를 통째로 날린 기분마저 드는 터라 그러한 상실감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분명 어제 하루를 잘 보냈지만, 그 기억 자체가 삭제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욕이 나왔지만, 그저 받아들어야만 했다. 이미 그렇게 된 것을 가지고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 거라고, 차라리 그럴 바에 지금 바로 자고 다음 날부터 백업을 잘 신경 쓰면 되는 거라고. 이번을 전화위복으로 삼자고 생각했다. 아니 아침에 일어나서 두 편을 다 써보자는 생각도 했다. 매일 쓰던 것의 하루를 빼먹는 것은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으로는 그저 잠을 자버리고 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자는 것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해주니까 아마 이 기분마저 망각도록 해줄 것 같았다. 나는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잠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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