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넘어 내가 마셨던 커피는 믹스 커피였다. 우리가 흔히 잘 아는 동결 건조된 커피, 프림, 설탕이 섞인 그 커피 말이다. 종이컵의 2/3쯤 물을 붓고 한꺼번에 넣은 후 빈 봉지를 막대처럼 접어 저어 마시곤 했다.
타인의 의지로 커피 전문점에 가면 시럽이 잔뜩 들어가거나 휘핑이 가득 얹어진 달달한 커피를 마셨다. 도무지 아메리카노를 왜 마시는지 이해가 안 되던 시절이 있었다.
드립 커피가 맛있다는 느낌을 처음 받은 곳은 광화문에 있는 커피스트 카페였다. 그 카페는 차가 한 대 정도 오갈 수 있는 골목을 오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작은 카페다. 매력적인 테라스가 미술관에 앞에 있는데 나는 그 자리를 무척 좋아했다. 봄 햇살을 맞으며 그 테라스에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이유 없이 행복했다.
나에게 커피스트 카페를 소개해준 친구는 작업할 때 5인용 모카 포트로 커피를 내려서 종일 마신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 친구는 모카 포트로 내린 커피를 찬양하며 어떤 일화를 자주 이야기했다.
이탈리아에서 모카 포트로 내린 가장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비법이 뭐냐고 물었더니 세제로 씻지 않는 것이 비결이라고 했단다.
커피를 끓여서 나온 커피의 기름이 기계에 남아 더 맛있는 커피 맛을 낸다나.
모카 포트 관리는 그냥 물로만 씻어 말리면 된다는 그럴싸한 설명에 설득 당해 2인용 모카 포트를 사게 됐다.
그 후로 기계로 내린 에스프레소보다 수분감이 더 있는 모카 포트의 커피를 좋아했다. 뜨겁게 데운 또는 찬 우유와 커피를 섞어 마셨을 때 그윽해지는 다양한 맛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지금은 더 수분감 있는 드립으로 내린 커피에 우유를 섞거나 얼음을 넣어 마시는 걸 즐긴다.
내가 드립 커피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좀 웃기다. 두 번째 회사를 퇴사하면서 커피를 배울 거라고 말했는데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내게 핸드드립 입문 세트를 선물했다. 어쩌다 핸드 드립 도구들을 갖게 되면서 핸드 드립을 시작하게 되었다.
핸드 드립을 시작하게 되면서 갈아둔 원두가 얼마 못가 맛이 변하거나 종업원의 실수로 잘못된 굵기로 원두가 갈아지는 상황을 몇 번 경험하고 그라인더를 사게 되었다. 당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전동 그라인더는 엄두도 못 내고 내 노동력으로 갈아야 하는 핸드 그라인더를 샀다. (나중에는 결국 전동 그라인더를 큰 마음먹고 구입했다.)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장인이 아닌 나는 장비 탓을 하며 여러 종류의 드리퍼를 샀다. 드리퍼는 재질, 모양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여러 가지를 사용하면서 내게 맞는 드리퍼를 찾았는데 그 드리퍼는 도자기로 된 하리오 드리퍼이다. 하리오 드리퍼는 원뿔형이라 드립 하기도 편하고 막 내려도 그럴싸한 맛을 내준다. 우리가 흔히 아는 칼리타 드리퍼는 생각보다 고난도의 기술을 요한다. 원두의 상태, 물 온도, 갈린 정도에 따라 어떻게 내린 커피는 나쁜 신맛이 강하게 난다.
핸드드립을 막 시작했을 무렵 좋아했던 원두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다. 좋은 원두는 설명대로 군고구마와 꽃향기가 난다. 과하지 않은 적절히 산도가 맛을 심심하지 않게 한다. 여러 나라와 품종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나는 원두가 신기해서 온갖 원두를 사다가 마셨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빈브라이더스 블렌딩 원두를 선물 받아 마시게 되었는데 싱글 오리진에서 나는 맛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 후 카페에서 직접 만든 블렌딩 된 원두가 있으면 마셔 본다.
그리고 작년 친구에게 가정용 더치커피 기구를 선물 받게 되었다. 여름이면 한시적으로 더치커피를 내려 냉장고에 넣어두고 마시게 되었다. 가끔 좋은 원두를 선물해주는 친구에게 더치커피를 내려서 선물로 주곤 한다.
달달한 믹스 커피를 마시던 취향에서 커피 자체를 즐기는 취향으로 바뀌는 긴 시간에 사람과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쌓아진 경험이 내게 하나의 취향으로 되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 언젠지 묻는다면 전기포트로 물을 끓이고 정성스레 원두를 갈고 좋아하는 드리퍼로 드립을 내리는 그 시간이라고 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