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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개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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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잇독 Dec 21. 2018

# 누렁이가 살아나다

누렁이 이야기 1

어릴 적 나는 시골과 도심의 경계에서 살았다. 시골에 살았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닐진대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집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위치했다. 당시에는 서울 근교에 '신도시'로 개발된 발달된 도시였고 논과 밭이 있던 지역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우리 집은 그 신도시의 바로 옆에 붙은 미개발 지역이었다. 우리 집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고 (운치 있게 보이지만 사실은 돼지농장에서 불법으로 흘러나온 오물로 인해 더럽혀진 개울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있는 지역까지는 차로 약 10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개발 계획에서 제외된 기존의 마을이 있는 동네였다. 굳이 지금은 '구도시'가 된 예전의 '신도시'를 운운하며 일산이란 지명을 거론한 이유는, 앞으로 얘기하려는 유년 시절의 배경이 도심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느 두메산골 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992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때, 일산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어 입주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집에 누런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시골에선 보통, 마당에 개 한 마리씩은 꼭 있었고 그러다 새끼를 낳으면 이웃들에게 한 마리씩 주곤 했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종종 강아지를 데리고 오셨다. 누렁이는 4주에서 6주쯤 된 이제 갓 어미젖을 뗀 귀여운 강아지였다. 털이 누래서 그냥 누렁이다. 얼룩덜룩한 점이 있으면 바둑이다. 뭐 시골에선 그랬다. 시골에서 흔히 보는 품종의 구분을 할 수 없는 일명 '똥개'라 불리는 전형적인 시골 개였다. 시골개의 매력 중의 하나는 특정 품종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함을 보이는 데에 있는데, 종종 귀족견 못지 않게 '잘생긴 놈'들이 나오기도 한다. 나는 그런 똥개가 제일 좋았다.


그 시기에도 경제적으로 윤택한 경우에는 '집 안에서' '애완견'을 키우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런 경우를 나는 티비에서만 봤을 뿐, 내 주변 친구들 중에는 없었다. 당연히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원주택이라 부르기 힘든 보잘것없는 집 마당 한 구석에 새끼 누렁이를 두었다.  


어느 쌀쌀한 가을 저녁 8시경, 부모님은 외출을 하시고 나랑 동생만 집에 있는 날이었다. 두 달도 안된 어린 녀석이 잘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여 나가 봤는데, 누렁이가 힘이 없이 축 처져 있었다. 낮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녀석이 말이다. 좀 더 자세히 보니, 이상하리만큼 누렁이의 배가 빵빵하게 차 올라 있었다. 새끼 강아지일 때는 식욕이 왕성하여 밥을 많이 먹으면 배가 빵빵할 때가 있다. 하지만 배가 너무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숨을 쉬기 힘들어하며 기운이 없이 쓰러져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 전에도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직감적으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내 눈에는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고작 12살 초등학생이 두 달된 어린 강아지에게 뭘 할 수 있으랴. 우리 집은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이라 주변 어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시고, 핸드폰도 없어 부모님께 연락을 드릴 수도 없었다. 인터넷도 당연히 없어서 찾아볼 수도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설령 어른이 계셨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동물병원?

그 당시 우리 지역에 동물병원이란 게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가축병원'을 본 적은 있지만 '동물병원'은 없었다. 그 당시 일산에 존재했느냐의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 집의 여건상 이 세상에 동물병원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 캄캄한 밖에서 작은 불빛에 의지하여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안쓰러운 마음으로 누렁이와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저 단순하게 배를 만져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배를 문질러 주며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누렁이가 활력을 되찾고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내게 기적과 다름없었다.


나의 정성에 감동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곧 죽을 것 같아 보였던 누렁이가 다시 생기를 얻고 두 발로 일어섰다. 단순히 과식을 한 거라 그냥 뒀어도 회복이 됐을는지는 모르겠다. 급체를 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건 분명한 것은 전혀 가망이 보이지 않았던 곧 죽을 것과 같은 심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누렁이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고 내가 살린 것 같은 뿌듯함도 있었다. 그렇게 누렁이는 잘 먹고 잘 싸며 건강하게 쑥쑥 자랐다. 개는 1살이면 사람의 20살 정도가 되기 때문에 6개월만 돼도 거의 성견만큼 커질 만큼 개는 순식간에 성장한다. 시골 개는 어미는 알아도 아비가 어떤 개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강아지를 데리고 와도 이 녀석이 어느 크기까지 클지 모를 수도 있다. 나는 비교적 큰 개를 좋아했는데, 작은 나의 팔을 한 아름 가득 채우는 개의 목덜미를 껴안을 때의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누렁이는 큰 진돗개만큼 크기가 커졌다. 같이 달리기를 할 땐 목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작은 나의 체구를 휘청거리게도 할 정도로 힘도 세졌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넓은 시골에서 누렁이를 데리고 뛰어노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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