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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Sep 20. 2024

사랑은 사건이 아니라 사고다

재해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남들이 말하는 결혼 준비만큼의 거창한 준비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름의 마음의 준비도 필요한 법인데, 사랑은 그런 것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미처 내 인생이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도 전에 머리끝까지 차올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몰아친 사랑은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만을 계속해서 안겨준다. 왠지 그런 사랑이 밉다. 인생에 있어 사고이자 하나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새 내 현실은 사랑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갇혀 끊임없이 긁혀나가며 생채기를 쌓아 나간다. 좋게 말하면 성장이겠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좀처럼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은 느끼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사고에 있어서 대상을 미리 특정하고 예견하기 어렵듯,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런 사실은 사랑에서 한 발짝 떨어져 본다 해도 우리의 삶을 고통 속에 헤매게 한다. 내가 어떤 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어릴 때에는 하나의 설렘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생채기가 쌓인 지금에서는 그것이 커다란 고통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전까지 쌓아왔던 경험칙과 기준 안에서는 좀처럼 떠올릴 수 없는 대상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 사고는 발생하고야 만다. 늘 그런 식이다. 나는 좀처럼 대처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다.


"올해는 바쁘게 보내야지"


작년 초 나의 다짐이었지만, 결국 나는 사랑이라는 참사의 피해자로 남고야 말았다. 이전까지도 알지 못했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취향을 눈앞에 가져다 놓아버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작년은 나름대로 내 인생에서의 분기점과 같은 해였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런 생각들을 부수어 버릴 만큼의 강렬한 사랑에 빠져들 수 있었다. 사랑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만큼 늘 우리를 시험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늠이 되지 않아 감히 저울에 올려놓지도 못할 대상들을 떨리는 손으로 저울에 올려놓게 만든다.


내가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이긴 하지만, 결국 선택과 후회는 온전히 네 몫이다.


사랑은 언제나 그렇게 속삭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랑에게만 귀가 얇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이 자연재해를 현실 속 문제들 때문에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사람은 결국 깊은 후회에 빠져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나는 머리를 싸매고 지독히도 삶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지만, 결국에 사랑이라는 구렁텅이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 구렁텅이가 온몸 구석구석 상처만을 안겨줄 것을 미리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삶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재해를 마주하고 그 속으로 뛰어들지, 혹은 계속해서 도망칠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이든 약간의 후회는 남을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 속에서 상처는 계속해서 쌓여 나간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일지는 스스로 부딪쳐보며 판단하는 수밖에는 없다. 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겪어나가면서, 그런 것들을 마주하고 뛰어드는 쪽이 후회가 많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인생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때에는 결코 사고를 일으켜주지 않는다는 모순들도 이런 나의 생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가 했던 것처럼 언제 어느 때 찾아올지 모를 사랑이라는 재해에 대비해 나름의 안식처, 마음의 여유, 비상시 대비책 등을 모조리 갖추어 놓으면, 놀랍게도 사랑은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 상황 자체가 나의 현실적 조건들에 대한 안목을 높여놓아서인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이성적인 매력이 떨어져서인 건지는 내 부족한 소견으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정작 원할 때에는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것이 인생의 진리이자 사랑의 법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안다. 그러니, 나는 그런 재해로부터 결코 도망치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찾아온 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재앙일지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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