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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Sep 20. 2024

사랑의 기원

시작에 대한 이야기


본디 사람은 무언가의 '시작'에 대해서 사유하고 집착하기를 즐긴다. 내 인생의 시작, 학업의 시작, 사회생활의 시작, 연애의 시작 등 인생에 있어서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굵고 진하게 줄을 그어가며 새겨 넣곤 한다. '사랑' 역시 예외는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 시작이란 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인류의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지만, 명확하게 기록으로써 전해지는 것은 고작 수천 년 정도 전부터이다. 그중에서도 사랑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성경이 아닐까. 노파심에 미리 밝히지만, 이것은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철저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던 상태(카오스) 속에서 이 세상은 사랑과 함께 탄생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인류는 그런 세상에 태어나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아가페'라 일컫는다. 아가페에는 어떠한 의도나 목적도 깃들어 있지 않다. 그 자체로 목적이자 순수한 의도인 것이다. 무언가를 줌에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준 것이 어떤 식으로 변화하든 개의치 않는, 궁극의 사랑. 우리가 암만 발악하고 날뛰어봐도 이 궁극의 사랑은 결코 일생 동안 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무엇을 행함에 있어 어떤 식으로든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고, 주체에 의해 그 외적인 목적은 조금이라도 섞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언제나 약간은 특정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음에 심히 개탄스럽다.


그나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랑 중에 그런 사랑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사랑은 그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주면서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물론 현실에서는 쉽지가 않다. 모두가 그런 사랑을 추구하는 현실이라면 단 한 사람도 상처 입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런 현실이란 잠깐의 생각에서도 존재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그런 마음을 먹고자 하면, 다른 누군가는 그 마음을 이용하려들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두려움에 감히 그런 마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궁극의 사랑에 눈 뜬다 한들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시련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쉽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는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싶지만, 대개 사랑은 그런 모순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혹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그런 궁극적인 사랑을 표방하는 사람을 어찌 감히 밀어낼 수 있을까. 자신의 모순 따위는 잊은 채, 우리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과 사랑에 빠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 사람과는 어느 때이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연유로,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은 사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버거울 수 있다. 주변 또래들이 왈가왈부하는 조건들에 의존해 사랑을 찾아 나서기 십상이다. 그것은 마치 돛을 달지 않은 보트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그 어떤 목적지도 알 수 없으며 좀처럼 나아가야 할 방향도 알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서 나아가는 것조차 역부족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사랑도 유전적 요인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이 더욱더 사랑을 주는 데에 있어 주저함이 없다는 사실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내리사랑'은 특별한 상황이나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다음 세대를 향해 줄기차게 내려간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도 부모, 그 위 조상들에게서 받은 사랑일 것이다. 그러니 현재 사랑하고 있다면, 조상들께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랑을 할 줄 아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것만큼의 큰 행운은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 해도 낙심할 필요는 없다. 내 세대부터 그 '내리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하면 될 일이다.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사랑을 제대로 주고 있지 못하고 받는 것에도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다면, 좀 더 노력하도록 하자. 사랑을 노력한다는 건 말이 된다. 노력 없는 사랑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 누구도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노력 없이 줄 수 없다. 그런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행해지고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사랑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필요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통해 그런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배울 만한 사례들은 주변에 얼마든지 넘쳐난다. 그 모든 사례들의 궁극점에는 결국 아가페적 사랑이 있을 것이다. 행하기가 힘들 뿐이지, 개념 자체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기에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좌절하지 말고 끈질기게 나아가자.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제대로 된 사랑 한번 안 해볼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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