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오피스 서바이벌] 4탄
폭풍 같았던 평일이 지나고 주말이 왔다. 임아정은 변호사가 된 초등학교 동창, 곽성진을 만나기로 했다.
곽성진: 아정아 나 이제 집에서 나간다
임아정: OMG!! 엉 조심히 와
아정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집 안을 둘러봤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참혹했다.
수북이 쌓인 설거지 거리들, 식은 치킨박스 3개, 바닥에 나뒹구는 양말들, 그리고 가방에 박힌 김칫국물 얼룩까지.
아정은 번개 같은 속도로 미소 어플을 켰다. 구세주 명화여사님에게 긴급 SOS.
30분 후 도착한 명화여사님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아가씨... 이 치킨 시체들은 뭐예요? 또 새벽까지 글 쓰셨어요?"
아정은 김칫국물로 뒤범벅된 가방을 뒤로하고 파리바게트로 갔다.
파리바게트, 오전 11시
문이 열리며 성진이 들어왔다.
"임아정 하이!"
키 180에 깔끔한 차림, 여전히 반듯한 성진이다.
"나는 안 마셔. 어차피 11시 반에 냉면집 문 열어."
'첫마디부터 FM 인증.'
아정은 최근의 참사들을 쏟아냈다. 김 부장의 일주일 뒤 계약해지 통보, 참이슬 팀장의 은밀한 텃세, 극심한 두통으로 조퇴까지.
"임아정, 너 항상 비슷한 패턴이 있다. 초등학교 때도 주판학원 3개월, 서예 2개월..."
"야, 그때 얘기 왜 꺼내!"
"그래도 너 한번 한다고 한 건 몰입해서 잘하잖아. 문제는 아닌 건 너무 빨리 포기한다는 거지."
정곡을 찔린 기분. 맞는 말이라 더 열이 받았다.
담배 생각이 났다. 전담을 꺼냈는데 작동이 안 됐다.
"헐, 고장 났나 봐. 수리점 가야겠네."
"수리점도 문을 일찍 열지 않을 텐데."
'이런 때 꼭 이런 일이 생기지.'
성진이 아정의 당황한 표정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의점 가자. 일회용으로라도 사줄게."
"괜찮아, 내가..."
"너 지금 통장 잔고 얼마야?"
"... 4천 원."
"그럼 닥쳐."
편의점에서 성진이 청포도맛 일회용 전담을 계산했다. 아정은 청포도 향 연기를 들이마시며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 자식은 언제부터 이렇게 똑 부러져졌지? 내 인생은 왜 이모냥이냐...'
11시 30분 정각. 금의환향(냉면집 이름).
"냉면집 이름 참 잘 지었네? 금의환향?"
"어, 여기 괜찮아. 을밀대, 평양옥급은 아니지만 면발 괜찮고 육수 안정감 있어."
"... 너 혹시 냉면 소믈리에야?"
성진은 물냉면을 후루룩 먹으며 본격적인 인생 상담에 들어갔다.
"임아정, 너 왜 맨날 돈이 없냐?"
"벌면 바로 써서..."
"그게 문제야. 돈 없는 사람들 특징이 그거거든. 돈 많이 벌어도 다 쓰거나, 아예 적게 벌거나."
가슴이 뜨끔했다. 정확히 자신의 패턴이었다. 반면 성진은 대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성인이 된 이후론 부모님께 손 벌린 적이 없는 애다.
"해결책은 간단해. 많이 벌고 안 쓰기."
"... 그게 쉬우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회사도 똑같아. 업무를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재밌어져. 새벽 2시까지라도 좋으니 업무를 네가 완전히 파악해 봐."
그 순간 성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대표님.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성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정아, 급한 일 생겨서 좀 빨리 가야 할 것 같아."
"괜찮아, 나도 바빠!"
'거짓말. 딱히 바쁠 일 없음.'
12시 30분 근처 카페에 도착 한 두 사람.
"민생회복 소비쿠폰 여기서 쓸 수 있나? 연 매출액 30억 원 이하 매장이어야 되는데."
아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연 매출액 30억?"
"신용·체크·선불카드 전용이거든. 정확해야지."
'이 정도면 FM을 넘어서 컴퓨터 수준이네.'
성진이 일어서면서 마지막 조언을 던졌다.
"그리고 임아정, 돌파구는 운동이야. 알겠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명화여사님이 전화했다.
"청소는 끝났는데 김칫국물 얼룩이 잘 안 지워졌어요. 과산화수소, 베이킹소다 다 해봤는데..."
성진이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받았다.
"여사님, 주방세제랑 치약으로 해보세요."
"어머, 정말요?"
"네, 김칫국물은 그게 제일 잘 빠져요."
"나 간다. 푹 쉬어라! 나도 피곤해서 집 가자마자 잘 거야."
"곽성진 고맙다. 밥도 사주고 전담도 사주고 커피까지."
"이번엔 진짜 오래 버텨봐. 너 할 수 있어."
집에 도착하니 명화여사님이 말끔하게 정리해 둔 방이 보였다. 그리고 가방. 김칫국물 얼룩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주방세제와 치약.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
아정은 노트북을 켜고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 [일상] 곽성진이 알려준 현실 직면법
"성진이는 돌파구는 운동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 내 돌파구가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누가 사준 청포도 전담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복잡한 문제의 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는 걸."
타닥타닥타다닥탁탁탁.
'이번엔 진짜 좀 달라지고 싶다.'
오늘도 새벽까지 키보드 소리가 이어졌다.
때로는 오래된 친구의 현실적인 한마디가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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