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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칼 갈은 임아정

시트콤 [오피스 서바이벌] 5탄

by 이빛소금


"민경님, 우리 영화관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민경의 반응은 뜨뜨미지근 했다.


"아,, 네"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정은 잠깐 멈칫했다.


'어? 왜 이래?'


하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


"내일 봐요, 푹 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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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정은 집에 돌아와 잠들었다가 깼고, 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차민경이었다.

"아정님, 제가 언제 영화관 가는 거 알겠다 했나요? 전 회사 사람들하고는 회사에서만 알고 지내고 싶어요."

아정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예전 같았으면 상처받았겠지만 지금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다음날 아침, 명화여사님이 반짝반짝 치워주신 집이 반나절도 안 되어 다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 진짜... 내가 태풍이야 뭐야."

짝 안 맞는 양말들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컵라면 용기며 배달 용기들은 또 탁자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아정은 한숨을 쉬며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곽성진이 머리 아플 땐 정리를 하면 맑아지고 개운해진다고 했었지...'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아정은 지각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집 밖을 나섰고, 2호선 지옥철에 몸을 실었다. 아정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젠 지옥철도 더 이상 지옥철이 아니다. 그냥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듣거나, 전자책을 본다.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14층회사에 도착했다.

냉장고에서 저번에 서둘러서 못 먹었던 삶은 계란 두 개를 꺼냈다. 약 먹고 속이 메스껍거나 토할 것 같지 않으려면 뭔가 배에 넣어야 했다. 훈제 계란을 야무지게 먹고, 약을 꿀꺽 삼켰다.


<오늘 해야 할 업무 리스트>

1. 샤로수길 신상 베이커리 '밀가루 공방' 인스타그램 콘텐츠 기획안

2. 양평 펜션 '루프탑 하우스' 블로그 리뷰 포스팅 원고

3. 서순라길 태국 음식점 '방콕키친' 유튜브 쇼츠 스크립트

4. 선릉 공유오피스 '워크라운지' 네이버 포스트 시리

5. 힙지로 인테리어 업체 '모던스페이스' 카카오톡 채널 콘텐츠


평소 같았으면 이 중 겨우 한 두 개 겨우 끝내고, 나머지는 "내일 마저 하겠습니다"였겠지만!!!

오늘의 아정은, 몸도 마음도 또렸했다.


'밀가루 공방'의 크루아상 사진을 보며

"바삭한 겉면과 촉촉한 속살의 완벽한 조화"라는 문구가 의식의 흐름을 타고 퉁~ 나왔다.


점심시간, 양석진 대리가 아정에게 물었다.

"점심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계란 탓인지, 약 부작용 탓인지 아정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사무실에서 혼자 오붓하게 있고 싶었지만...

김 부장도 계속 사무실에 있었다. 아정은 기획안 작성 서둘러 마무리하고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회사 근처 무인 샐러드 가게에서 '닭가슴살 랩'을 하나 먹었다.


오후에도 집중력은 이어졌다. '방콕키친' 유튜브 쇼츠는

"태국 현지에서 직수입한 쌀국수가 입안에서 춤을 춘다"로 마무리했고,


'워크라운지' 포스트는

"프리랜서들이 꿈꾸는 그 작업 공간",

"오늘도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의 아지트"로 시작과 끝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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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50분.

양석진 대리가 아정의 자리로 다가왔다.


"아정님, 오늘 콘텐츠들 확인해 봤는데..."

'헉, 뭔가 잘못됐나?'


아정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젠 제가 크게 손댈 게 없던데요?"


양 대리가 쌍따봉을 치켜세웠다.


"평소에는 2개도 힘들어했는데 오늘은 5개를 다 완성했네요?

게다가 퀄리티도 훨씬 좋아졌어요.

'방콕키친'은 제가 읽으면 진짜 군침이 돌았고,

'워크라운지'는 저도 퇴사 갈기고 가서 일하고 싶어 지네요,

진짜 잘했고, 고생 많았어요. 아정님."


아정은 얼굴이 빨개졌다. 누군가에게 “잘했다”는 말을 듣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나.

오래된 목마름처럼, 그 말이 마음 깊숙이 내려앉았다.


'맞다. 평소에는 거짓 보고도 했었는데...'


지난주에는 콘텐츠를 하나도 못 써서, "홍대 맛집 포스팅이랑 이태원 카페 리뷰 완성"이라고 거짓 업무일지를 썼던 적도 있었다. 실제로는 제목만 적어놓고, 내용은 빈 파일이었는데. 그때의 죄책감과 지금의 뿌듯함이 대조적이었다.


'임아정 너 진짜 칼 갈았구나?'


퇴근길, 아정은 올리브영에 들렀다. 등드름 때문에 고민이던 차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등드름 전용 바디워시 하나와... 마음이 허해 아프리카산 캔맥주도 하나 골랐다. 집에 와서 보니 아프리카산이 아니라 프리도 맥주였다. 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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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정은 캔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오늘은 축하할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쿠팡이츠에서 치킨을 주문했다. 수정이네 치킨 - 순살반, 양념반 순살치킨.

곽성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곽성진ㅋㅋㅋ뭐 하냐 나 밤 10시에 치킨 시켰다"

"수정이네 치킨? 거기 맛있어! 맛있게 먹어 ㅋㅋ"


따뜻한 응원에 마음이 더 좋아졌다. 곽성진 이 자식은 참 츤데레여.

사실 오늘 저녁엔 온라인 스터디가 있었지만, 아정은 기필코 오늘만큼은 소설이 너무나 쓰고 싶었다.


'아니야. 오늘은 소설을 써야겠어.'


약속을 정중히 취소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자정, 드디어 치킨이 도착했고, 아정은 맥주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순살은 바삭하고, 양념은 달콤하지만 좀 매웠다. 콧물을 훔치며...

'아 겁내 맛있네.'

'드디어... 소설을 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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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일할 때보다도 더 집중력이 살아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의 집중력은 차원이 달랐다.

타닥타닥타닥타다닥.


빙글빙글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떠나는 민지

(민지는 아정의 분신이다

아정은 어렸을 적부터 세계여행을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들로 계속 미루고 미뤘다. 민지라는 소설 속 인물로

아정 대신 먼저 세계여행을 시켜주면서 대리만족을 해보려 한다.)


아정은 혼자 깔깔대며 웃으며 계속 타이핑했다.

'이런 하루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새벽까지 이어질 키보드 소리 속에서, 아정은 처음으로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음화에서 계속...


때로는 작은 변화 하나가 하루 전체를 바꿔놓습니다. 약을 챙겨 먹고, 거짓 대신 진실을 선택하고,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그 작은 용기가 임아정의 반격을 시작하게 할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시작한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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