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웹툰 번역의 최후

프리랜서가 '하기 싫은 일'을 맡았을 때

by 스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카페 한구석에 앉아 노트북 화면 속 살색 가득한 19금 웹툰을 보는 삼십 대 중반의 여자.

이게 내 모습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음, 야한 웹툰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성인 웹툰을 번역한다.



가끔 한국 웹툰을 영어로 번역하거나 감수하는 일을 소개받는데.

최근에는 한 유료 웹툰 플랫폼과 정식으로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연재 작품을 번역할 기회가 있었다.

유료 웹툰 플랫폼이라면 번역 수입도 나쁘지 않겠지, 하는 기대로 계약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 플랫폼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19금'.

그런데 이 19금 웹툰 번역이, 참 쉽지 않은 일이더라...


내가 미리 준비해 둔 포트폴리오의 샘플 번역만으로는 내 번역 스타일을 가늠할 수 없다면서, 기업은 몇 가지 웹툰 작품을 제시하며 그중 하나를 골라 한 에피소드를 번역해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처음 보는 웹툰의 에피소드 한 편을 번역하고 나서야 '우리 팀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코멘트를 받고 프리랜서 웹툰 번역가로 정식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워낙 대형 웹툰 플랫폼이라 그런지 지켜야 하는 이런저런 규정과 번역 가이드라인이 참 많았다.

작품을 배정받아 번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화상 미팅으로 사내 번역 가이드라인이나 스케줄 등에 대해 이런저런 교육도 받았다.


하필 한창 일이 많이 몰려있는 시기였지만, 재미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즐겁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번 재미있는 일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몸 사리지 않고 하는 편이니까.


평소에 좋아하는 귀엽고 위트 있는 일상툰이나 알콩달콩한 남녀의 러브 스토리 등을 기대하며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처음으로 의뢰받은 작품은 BL.

BL이 무슨 약자지? 찾아보니 '보이즈 러브'. 남성들 간의 사랑을 그린 작품의 장르라고.

남성들 간의 사랑을 다루는 19금 작품이 내게는 무척 낯설었다. 작품을 의뢰받기 전까지는 그런 작품은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었으니.


본격적으로 내게 작품을 의뢰하기 전, 기업은 인물이나 BL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지 물어왔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런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작업에 있어 불편함은 없을지 나의 의사를 물은 것.

나는 이것 또한 새로운 도전이려니 하며 괜찮다고, '오픈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세상 쿨하게 답을 보냈다.


그런데 막상 작품의 첫 에피소드를 받아봤더니. 어, 음, 이 정도일 줄이야... -.,-;;

작품은 첫 에피소드부터 매우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베드신을 자랑했다.

아마도 초반에 구독자들을 유혹해 다음 에피소드를 추가 결제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에는 그 작품을 맡을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일이 없는 비수기였다면 고민 안 하고 감사히 냉큼 받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다른 여러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업이 처음으로 내게 의뢰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거절하면 또 언제 다음 작품을 맡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아 모르겠다, 일단 고. 그렇게 덜컥 첫 19금 웹툰 번역을 계약했다.


19금 웹툰을 번역하는 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주로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하는데, 화면 가득 살색으로 채워진 웹툰을 보는 내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도저히 카페에서 일할 엄두가 안 났다.

가끔 카페 제일 구석 자리로 가서 모두의 시선을 피해 몰래 번역하곤 했지만, 그렇게 숨어서 몰래 번역하는 것도 오래 못할 짓이었다.


대개 번역 의뢰를 받으면, 의뢰받은 작품과 비슷한 주제나 톤의 다른 작품들(도착어, 즉 번역될 언어로 된 영화나 만화나 책 등)을 많이 읽고 본다.

덕분에 19금 성인물 영화도 찾아보고 성인 만화도 찾아보고... 한동안 가슴 떨리는 야릇한 시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 가이드라인에 맞춰 침대에서의 신음 소리나 행동을 비롯한 다양한 의성어, 의태어를 영어로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때로는 스토리를 영어로 옮기는 일보다는 기업에서 보내준 의성어, 의태어 파일에서 표현을 검색하고 복붙하는 일이 더 많았다.

으읏이나 윽, 흣, 아아 와 아앗!, 하, 하아아는 각각 어떻게 달리 번역할 수 있을까와 같은 부류의 고민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첫 BL 번역은 실망스러웠다.

몇 달에 걸쳐 1부, 즉 스무여 개의 에피소드를 어찌어찌하여 제때 다 번역하긴 했지만.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만들어내지 못했을뿐더러, 다음 시즌도 이어서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 경험에서 깨달은 점 세 가지.

1. 적성에 맞는 일(좋아하는 작품을 맡아야)을 해야 잘할 수 있다.

2. 프리랜서에게 있어서 '고정된 스케줄의 일,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3. 편한 작업 환경에서 번역해야 좋은 퀄리티의 번역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나씩 부연 설명을 해보자면.

우선 첫째, 좋아하는 작품의 일을 맡아야 하는 이유.

한 작품을 끝까지 번역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든다.

웹툰의 경우, 한 시즌 또는 한 부가 수십여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웹툰 작가가 매주 연재하듯, 번역가 또한 매주 번역물을 완성해 마감일을 지켜 납품해야 한다.(물론, 부득이한 경우엔 사정을 미리 알리고 일정 조율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런데 맡은 작품이 본인에게 재미가 없다면, 더군다나 본인이 평소에 많이 보는 종류의 내용이 아니라면, 그 작품을 잘 번역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 번역은 무척이나 고달픈 여정이 될 것이다.


둘째, 고정된 스케줄의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이 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까.

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언제, 어떻게 나를 찾아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일한다. 그야말로 '찐 프리랜서'다.

그런데 그런 내게 매주 정해진 분량의 일을 정해진 마감일에 매주 납품하는 '고정된 일'은 내게 안정감을 주기는커녕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다른 여러 일들이 나를 찾아올 때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매주 마감해야 한다는 부감감도 컸다.

조율할 수 없는 스케줄을 전부 소화해내려면 몸은 혹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과물의 퀄리티도 떨어질 확률이 높다.

매주 마감해야 했던 웹툰 번역 작업 덕분에 나는 '탄력적인 스케줄'로 일할 수 있다는 게 프리랜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결국, 남들이 다 좋다는 '고정된 일, 고정된 수입'은 프리랜서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비록 많이 일할 때는 많이 벌고 적게 일할 땐 적게 벌더라도, 프리랜서에게는 쏟아부었다가 '잠시 쉬어가는 타임'이 반드시 필요하다. 쉬어가는 타임이 있어야 쏟아부을 힘도 생기니까.


마지막으로, 일하는 환경이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는 내용.

내가 매일 억지로 몸을 밖으로 끌고 나와 카페로 향하는 건, 집에서 일하면 긴장감이 떨어져 몸이 축 늘어지고 집중도 잘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금 웹툰을 번역하던 그 당시, 밖에 나가서 작업하려 할 때마다 19금 베드신으로 채워진 내 노트북 화면을 들킬세라, 몰래 조금 작업하는 듯하다가 머지않아 집에 가서 더하지 뭐, 하며 금세 집으로 쫓아왔다.

그러고는 결국 집에 돌아와서도 축 늘어진 나는 제대로 꼼꼼하게 작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번역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면 결코 좋은 퀄리티의 번역물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것은 진리다.


모름지기 프리랜서란, 무조건 많은 양의 일을 욕심내기보다는 본인의 적성에 맞고 본인이 할 수 있고, 본인의 스케줄에 맞는 그런 일을 선택해야 성공적으로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내가 19금 BL 웹툰 번역을 통해 배운 교훈이다.


부디 다음에는 내가 조금 더 흥미를 가질만한, 평소에 좋아하는 웹툰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때는 더 많은 애정과 열정을 쏟으며 즐겁게 번역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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