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리로 무대에 서는 여배우

통역의 현장

by 스민

“So happy to meet you!”

대학로 공연장 앞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목발을 짚고 한 다리로 당차게 서 있었다. 너무나도 우뚝, 흔들림 없이 똑바로 서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그 모습에, 오히려 두 다리로 서 있는 나는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자신의 첫 뮤지컬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저 멀리 미국에서 날아온 애니타 홀랜더.

대학생 때 암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현재는 뉴욕을 주 무대로, 세계 각지에서 공연하고 있다.


지난 12월, 내 클라이언트인 장애인 예술 단체에서 해외 공연 쇼케이스를 위해 그녀를 한국으로 초청했고, 그녀는 본인이 직접 만든 1인 뮤지컬 <나의 생존 가이드>(영어 원제는 “Still Standing”)를 한국에서 최초로 공연하게 된 것이다.

<나의 생존 가이드> 공연 중 의족을 빼고 한 다리로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애니타. (이번 한국 공연에서는 무대 한쪽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통역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나는 ‘컴퍼니 매니저’라는 타이틀로 한국 공연 스태프들과 그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는 일뿐만 아니라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와 라디오 인터뷰 통역을 맡아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 내가 애니타를 따라 배우 분장실로 들어가자, 그녀는 공연 전에 옷을 예쁘게 잘 다려야 한다며, 다리미에 한글로 뭐라고 쓰여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직접 다림질을 도와주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면서 본인이 직접 할 수 있다고, 실크 블라우스를 다리려면 어떤 모드로 바꿔야 하는지, 다리미 위에 쓰여 있는 기능만 좀 알려달라고 했다. 옷감 종류에 따른 다리미 모드 세 가지를 알려주었더니 혼자 알아서 뚝딱 다림질을 끝냈다.


애니타를 처음 만난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그녀로부터 받은 인상은 ‘참으로 독립적인 여성’라는 것.

사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함께 일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애니타에게 그 어떤 특별한 배려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공연장에서 자신이 묵는 호텔까지는 거리가 짧아서 목발을 짚고 혼자 걸어갈 수 있다면서 호텔 픽업 및 드롭도 마다했고, 두 다리를 가진 신체 건장한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한 다리로 서서 노래 한 곡을 부를 수 있는 특기가 있다면서 자랑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면서 기존에 내가 가졌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깨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애니타를 보고 감탄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정한 ‘프로 여배우’였다.

공연을 앞두고 틈만 나면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연습을 했고, 목을 가다듬었고, 수시로 목캔디를 먹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친절하게 나에게도 하나 주었다).

분장실에서는 몇 번이고 거울을 확인하며 세심하게 화장을 고쳤고, 무대 감독에게는 공연 전 10분 단위로 미리 알려달라고 당부했으며, 매번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는 공연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도 했다.

하지만 무대에 올라서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긴장한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애니타는 자신감 넘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피아노와 배우 한 명이 전부인,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단조롭다고 할 수 있는 무대에서 그녀는 화려하게 빛났다.


나는 애니타의 공연이 끝난 후에 관객과의 대화를 통역했는데, 다행히 통역을 하던 순간에는 관객과 애니타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해주기 위해 온 집중력을 쏟느라 전혀 울컥하거나 눈물을 흘릴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대다수의 (장애인 및 일반) 관객들이 애니타의 말에 감동해 흐느끼면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순간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통역할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할 따름이다.

공연 직후 내가 애니타와 관객과의 대화를 통역하는 모습. (이번에도 한 쪽에서는 수어통역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관객과의 대화 중에서 가장 기억 남는 대목이 있다.

한 장애인 관객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없었냐”는 질문을 했고, 애니타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많다고, 사실 오늘 아침에도 공연을 포기할까 생각했었다고. 아침 식사를 하러 걸어가던 중, 하필 바닥에 깔린 전선 배관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팔을 부딪치는 바람에 더 이상 한쪽 팔에 힘을 줄 수가 없게 되었다고. 당장은 목발도 짚을 수 없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이렇게 먼 한국까지 와서 팔을 다쳐버렸다고 투덜거렸는데... (실제로 공연 전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속상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어떻게 하면 공연을 제대로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스태프들과 상의해서 무대 동선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공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이유인즉슨, 이렇게 공연을 취소하고 포기하고 나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고. 그래서 결국 다시 이렇게 무대에 서게 되었고, 덕분에 이런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니타는 자신이 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전 세계를 누비며 여러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장애인들이 애니타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노래하고 활발히 배우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그 어떤 역경도 긍정적인 상황으로 승화하려는 애니타의 태도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 곁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 내용을 통역하며 다양한 관객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나는 너무나도 감사했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일에 내가 참여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통번역사가 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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