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12월, 대학로의 한 장애인 예술 센터에서 '노 스트링스 어태치드 장애 극단(No Strings Attached Theatre of Disabilities)'의 단장이 공연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배우들에게 한 말⏤정확히 말해, 그가 당시 영어로 뱉은 말을 내가 한국어로 옮겨본 것⏤이다.
'어쭙잖고 어설픈 실수를 저지르느니, 실수를 할 거라면 제대로 멋지게 망쳐보라'는 단장의 통 큰 지시였다.
당시 나는 해외 장애예술단체 및 예술가들과 함께 해외 공연 쇼케이스에서 통번역사로 일했다. 그때 만난 호주에서 온 '노 스트링스 어태치드 장애 극단'은 극단 이름처럼 다양한 장애를 가진 단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학습장애를 가진 배우도 있었고 과거에 뇌졸중을 앓은 배우도 있었다. 이 극단은 호주에서 호평받은, 기억과 망각을 주제로 한 연극 'I Forgot to Remember to Forget(국내에서 채택된 제목은 <그게 뭐였지>이다)'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상연하게 되었고, 나는 이 연극의 자막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와 워크숍 통역까지 맡게 되면서 나는 이 극단과 긴밀하게 일할 수 있었다.
<그게 뭐였지> 공연 후에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내가 번역한 작품에 대한 논의를 직접 통역했다.
연극 자막 번역은 일반 문서 번역이나 드라마, 영화 영상 번역과는 매우 다르다. 사람의 눈이 일정 시간 동안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수는 제한되어있으므로 이를 고려해 알맞은 길이로 내용을 압축하여 번역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즉석에서 관객에게 재미를 선사해야 하는 연극의 특성에 맞게 위트 있게 펀치라인을 잘 살려서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번역 작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들이 영어로 연기하는 것을 듣고, 보면서, 대사와 공연 진행 상황에 맞추어 (미리 한글로 번역해놓은) 화면의 자막을 직접 넘기는 오퍼레이션도 업무에 포함된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대사나 연기 실수를 할까 봐 긴장했다면, 나는 배우들이 내려다보이는 2층 오퍼레이션 공간에서 자막을 넘기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느라 긴장해야 했다. 눈으로 배우들의 행동을 보고 귀로는 대사와 음악을 들으며 손으로는 자막을 제때 넘겨야 하는, 상당한 순발력과 멀티태스킹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적 장애를 가진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실수를 하거나 정해진 대본과 다르게 행동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돌발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공연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자막을 넘겼다.
처음에는 장애를 가진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서 실수 없이 제대로 공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총 3회에 걸친 공연을 함께 하면서, 이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극단의 운영방식에 점차 익숙해졌다.
노 스트링스 어태치드 장애 극단이 공연 직전에 늘 하던 리추얼(의식)이 있었다.
단원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함께 동그란 원을 만들고 서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고, 발음 연습도 했다. 이때 그 누구도(공연을 준비하는 스태프 조차) 방해해선 안되었다. 말을 걸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단원들의 집중력을 흩뜨리는 것도 금물이었다.
무엇보다, 이 리추얼이 끝날 때마다 단장이 하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망칠 거라면 제대로 망쳐버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살면서 "망쳐도 된다"는 말을 내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어떤 일을 정말로 망치고 싶어서 망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저 더 잘하고 싶은 마음뿐인데, 그 잘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오는 부담감과 압박감이 오히려 일을 망치기도 한다.
단장은 이렇게 '망쳐도 된다'는 말을 장애인 단원들에게 서슴없이 해줌으로써 그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 누구도 실수하지 않았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많은 관객들이 함께 웃고 울었다.
나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편하게 연기하고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단장의 말 한마디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을 지켜보며 화면의 자막을 넘기는 그 긴박한 순간,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나 또한 망쳐도 된다는 단장의 메시지를 속으로 되뇌었다. 웬일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여유도 조금 생기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