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듣던 유명 작가님의 해외 언론사 인터뷰 통역을 맡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작가님의 팬이기도 한 나로서는 첫 만남을 앞두고 어찌나 떨리던지!
통역 하루 전날부터 '과연 내가 실수 없이 통역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평소에 좋아하는 작가님을 실제로 뵙게 된다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인터뷰는 해외 언론사에 기사로 실릴 예정이라 따로 영상이 녹화되거나 방송으로 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종종 통역 현장에서는 예상에 없던 돌발상황이 발생하기도 해서 최상의 모습으로 꾸며서 가기로 했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을 직접 만날 텐데. 내가 말로만 듣던 '성덕'이 되었구나.
돈 들여 메이크업 서비스를 받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보다 훨씬 정성 들여 화장을 곱게, 진하게 했다.
머리도 최대한 깔끔하게, 드라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풍으로 살살 말려 평소엔 볼륨감없이 착 달라붙어있는 웨이브가 최대한 살아나도록 했다. '꾸안꾸' 룩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깔끔한 니트 탑과 하루 전날 예쁘게 잘 다려놓은 정장 치마도 입었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예쁘진 않더라도 깔끔함에서만큼은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어 드디어 작가님을 직접 만났다.
생각보다 작고 가녀린 체구의 작가님은 마치 소녀 같았다.
본인도 전날 밤잠을 설쳤다고 하시는 작가님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예상 질문에 답변을 빼곡히 적은 종이를 손에 꼭 쥐고 계신 걸 보고, 인터뷰에 철저히 준비하시고 오셨음을 알 수 있었다. 어찌나 배려심이 넘치시던지, 내가 "오늘 어떤 말씀을 하실 것 같으세요?"하고 조심스레 여쭤보자, "같이 보실래요?" 하시며 예상 답안지를 내 쪽으로 더 살짝 기울여 보여주셨다.
해외 언론사와의 인터뷰는 화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소음을 차단하고 소리를 또렷이 잘 듣기 위해 작가님과 나는 함께 노트북 한대를 앞에 두고 노트북과 연결한 하나의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꼈다. (으아아... 밀리언셀러 작가님과 이어폰을 공유하다니!!)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인터뷰 통역은 무사히 잘 마쳤다.
그렇게 겨우 한 시름 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에도 다른 언론사와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이 문제였다. 이 놈의 몸뚱이가 화근이었다.
이런 것도 고질병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고질병이 하나 있다.
평소엔 멀쩡하지만, 가끔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몸이 조금이라도 약해져 컨디션이 나쁘면 마법에 걸리는 날 심한 생리통이 찾아온다. 복통과 근육통만 있으면 양반이고, 대개는 혈액순환과 위 소화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뭘 먹든 급체를 한다. 복통과 체기가 동시에 찾아오니, 최악이다.
하필 그 중요한 시기에(그 전 주에 일이 많이 몰려서 무리를 좀 했었다) 몸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오랜만에 생리통이 심하게 찾아왔다.
내 몸은 '밀리언셀러 작가님과의 두 번째 만남'이라는 내 생에 몇 안될 중대한 상황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몸이 뻐적지근한게, 곧이어 복부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럴 땐 뭘 먹든 바로 체할 게 뻔해서, 식사는 생략했다. 어차피 배고플 겨를도 없었다.
통증이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떡하지, 오늘 통역하러 갈 수 있을까. 차라리 못 간다고 빨리 연락해야 하나.'
하지만 당일에 일정을 취소하게 되면, 또 언제 다시 스케줄을 잡을 수 있을지, 잡을 수는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작가님, 해외 언론사 기자,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의 일정을 다 맞추기는 결코 쉽지 않을 터.
그리고 다음번엔 내가 다른 통역사로 대체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작가님의 개인 사정도 아니고 '일개 통역사'인 나 때문에 일정을 변경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클라이언트가 뭐라고 생각할까. 얼마나 싫어할까. 오늘부로 다음 일은 기약하지 못할 게 뻔했다.
아, 망했다, 어쩌지, 어쩌지, 하면서 우먼스 타이레놀 두 알을 동시에 삼키고 제발 효과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통증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끙끙 참느라 식은땀이 났다.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린 내 얼굴과 끙끙 앓는 모습에, 집에 계시던 부모님도 근심이셨다.
"오늘 못 간다고 빨리 연락해." 아빠가 툭 내뱉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요. 알지도 못하면서.'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옆에서 부모님까지 부추기니 짜증이 팍 났다.
이런 내 맘도 모르고, 옆에서 부모님은 자꾸만 재촉하셨다. "몸이 아픈데 그럼 어떡해."
"아, 일단 좀만 더 참아보고..."
속으로 나는 어떻게 해서든 가야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통역하나, 지금 와서 대타를 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일에 취소하면 앞으로 난 어떻게 될까, 그렇지만 설사 내가 어찌어찌해서 현장에 도착하더라도 제대로 집중해서 통역할 수는 있을까.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통역 퍼포먼스가 더 걱정이었다.
안 되겠다. 생리통에 대처하기 위해 최후의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온수 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주머니를 배에 대고 웅크린 채 소파에 스르륵 누웠다.
나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걸까. 한참 그렇게 뜨거운 주머니를 배에 대고 있었더니, 단단히 뭉쳤던 혈관이 조금씩 풀어지고 몸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통증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아무래도 하늘이 나를 갸륵하게 여겼나 보다. 할렐루야.
'아, 이제야 좀 살겠네.'
정신을 차리고 문득 시계를 봤더니... @0@!!! 아니,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이제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경기도 집에서 서울의 인터뷰장까지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릴 텐데, 이동시간이 빠듯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무조건 지각이었다.
"아빠, 나 빨리 가야 돼!"
조금만 일찍 통증이 멎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통증이 가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모르고, 어느새 또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오늘은 결국 집에 있으려나 싶었는데 갑자기 가겠다고 하네?
상황 역전이 당황스러웠을 법도 한데 아빠는 특공대라도 된 것 마냥,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신속히 움직였다. "차로 직접 태워줄까"하시며 네이버 지도로 예상시간을 이렇게, 저렇게 계산해보셨다.
하지만 아무래도 차로 이동하면 예상시간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 것 같다시면서, 결국 운영 시간이 정확한 지하철을 이용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가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아빠는 차로 지하철 역까지만이라도 태워다 주기로 하셨다.
아까 가지 말라고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빠는 먼저 나가서 차를 문 앞에 대기시키겠다며 쏜살같이 나가셨다.
'아플 땐 편한 게 장땡이지.'
나는 전날과는 사뭇 다르게,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니트와 청바지를 집어 들어 대충 껴입었다.
몸의 온도가 떨어지면 다시 통증이 찾아올 것 같아, 옷에 붙이는 핫팩을 복부 한가운데 딱 붙였다.
안 그래도 불룩한 배가 더 튀어나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니트로 가리면 티 안 날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화장도 좀 해야 하는데... 작가님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벌써 쌩얼을 틀 수는 없는데...
이번에도 작가님 곁에 딱 붙어서, 이어폰을 함께 나눠 꽂고 통역할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이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빨리 출발이나 하자. 도착하면 근처에서 화장하지 뭐.
늦는 것보다는 그게 낮지.'
그렇게 곧바로 역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은 턱없이 촉박했다.
역에 도착한 시간은 인터뷰 시작 10분 전. 회사는 역에서 걸어서 1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화장까지 하는 건 사치다.
회사 담당자분께는 생리통이 있어서 약을 먹고 가느라 시간이 빠듯하게 도착할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고, '늦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파워워킹을 시작했다.
당황해서인지, 건물에 도착해서도 미로 같은 사무실 방들 사이에서 미팅룸을 못 찾고 여기저기 헤맸다.
'분명 어제 왔던 곳인데... 왜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
전날에 소개받고 잠시 인사 나눈 사장님과 마주쳤다.
사뭇 달라진 복장과 쌩얼 때문인지, 나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추리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알은척하지 못했다.
"어디 찾으세요?" "미팅룸이 어디죠?"
그렇게 겨우 미팅룸에 도착했더니, 이미 담당자와 작가님은 모두 노트북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통역사 때문에 시작 못하고 있다니. 결례를 범할 뻔했다.
다행히, 아직 해외 언론사 기자는 채팅방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휴...... 살았네.
화장 못한 쌩얼에 후줄근한 니트와 청바지를 입고. 전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나를 보고 작가님도 순간 흠칫하시는 눈치였다(그저 나만의 느낌적인 느낌이었을까^^;;).
혈액순환이 안 돼 핏기가 사라진, 퀭한 내 쌩얼을 보고 안 놀라셨다면 오히려 그게 더 놀랍다.
생기 있어 보이게 입술에 립스틱이라도 바를 걸... 너무 추레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인터뷰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으실 작가님께 굳이 구구절절, 내가 아파서 어쩌고 저쩌고 설명하면 왠지 신경만 더 쓰실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프로답지 못한 것 같아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텐데, 쌩얼로 작가님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워 웬만하면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꼈다. 어제보다 더 어색해진 느낌이었다.
다행히 인터뷰는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났다.
쌩얼이 떳떳하지 못해 대충 수줍게 인사하고 건물을 박차고 나온 게 내가 기억하는 작가님과의 마지막이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은 채, 빈 속으로 통역한 거였다.
보통은 당이 떨어지면 집중하기가 힘들어 통역 전에 든든히 먹고 통역에 임하는데. 닥치면 빈속에서도 이렇게 통역이 되는구나. 꼴이야 어떻든, 어찌어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통역한 스스로가 신기했다.
근처에 보이길래 순두부집을 찾았다. 생리통엔 순두부지.
손님 없이 텅 빈 가게에 혼자 자리 잡고 앉았더니, 갑자기 괜한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 못 하는 내 처지가 서러웠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까지나 했을까, 나는 그만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는 스스로가 대견했고, 잠시나마 생리통을 멎게 해 준 하늘에 감사했다.
그리고 작가님께서 부디 쌩얼의 추리한 내 모습은 기억에서 싹 지워주시고, 첫날의 좋은 기억만 남겨주시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