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사실 난 전혀 그레이트하지 않았다. 빈말임을 알았지만 내게는 힘이 되었던 말. 열두잉그뤠잇! 덕분에 나는 실수를 뒤로하고 다시 정신 바짝 차려 통역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통역은 첫 한마디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말은 통역사들 사이에서 진리로 통한다. 그렇다. 초반 기싸움이 중요하다. 처음에 어버버, 하며 버벅거리거나 문장을 한 번에 매끄럽게 내뱉지 못하면 자신감을 잃게 되고, 결국 나머지 퍼포먼스마저 말짱 꽝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반대로, 처음에 순조롭게 몇 마디를 뱉고 나면 나중엔 조금 삐끗하더라도(?) 티가 거의 안 난다. 나도 떳떳하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클라이언트도 기부니가 좋다. 그래서 통역을 시작하는 첫 한 문장, 한 마디를 내뱉기 전까지는 그렇~~게 떨릴 수가 없다.
문제의 그날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그때 맡은 통역 행사는 외국인 문화예술 강사들이 국내 예술강사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문화예술 워크숍이었다. 레크리에이션까지 동반하는 조금 '가벼운 분위기'의 통역이었다. 통역 하루 전날, 담당자로부터 워크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아이스브레이킹으로 간단한 O/X 퀴즈를 진행할 거란 말을 전해 들었다. 미리 정해진 질문 목록까지 전달받았다. 주로 '나는 -이다/아니다' 식의 쉽고 짤막한 질문들이었다. '뭐 딱히 외우거나 크게 준비해야 할 건 없겠네.' 대충 한번 쓱 읽어보고 큰 부담은 없겠다 싶어 몇 가지 키워드만 한글로 끄적여 놓았다.
그런데 웬걸.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해 준비에 소홀했던 탓일까. 다음날, 외국인 강사가 아이스브레이킹 첫 질문을 던지는 순간. 생소한 영어 단어 하나가 내 귀를 스쳐 지나갔고,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갑작스런 당혹감을 느꼈다. 단어 하나가 내 발목을 잡은 게 분명한데, 연사의 말은 이미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터. 질문지에도 분명 떡하니 쓰여 있었을 텐데 종이에 인쇄된 글자가 너무 작았던 걸까. 손에 든 질문지의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몇 번째 항목이지...... 간신히 뭐라 뭐라 질문을 짜내긴 했지만 연수생들이 그런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 리 없다. 결국 그 누구도 질문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이스브레이킹은커녕, 오히려 더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강사들도 내가 뭔가 실수를 했음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기분은 최악이었지만, 그렇다고 행사를 망칠 순 없었기에 나는 풀이 죽은 채 그 뒤로도 꾸역꾸역 통역을 해나갔다. 내 모습을 직접 볼 순 없었지만, 아마 그때 난 쭈구리 얼굴을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머지않아 숨을 조금 고를 수 있는 휴식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까 내가 통역을 맡은 외국인 강사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뭐라 항의하면 어쩌지, 더욱더 못난 쭈구리가 되려는 순간...... "You're doing great!" 그레이트하지 않았음에도 그레이트하다며 내 기를 조금이라도 살려주려는, 그 짧은 한마디를 듣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그래, 이 따뜻함에 보답하자. 정신 똑띠 차리고, 아까 한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자. 그렇게 나는 바닥까지 추락한 자신감을 애써 끌어올려 남은 통역을 이어갔다. 그리고 비록 그레이트하게는 아니더라도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참, 그 문제의 단어는 'K-12'. 미국에서 유치원부터 12학년(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교육 과정을 일컫는 용어인데. 쉽게 '정규 교육 과정'이라고 표현하면 된다고 워크숍 담당자가 귀띔해주었다. 뇌리에 단단히 박혀 잊으려야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담당자가 귀띔해준 말이 하나 더 있었는데. 워크숍 마지막 날 연수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강의 평가에 '통역이 매우 좋았다'는 피드백이 많았다고. :)
덕분에 나는 매년 이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고 있다.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그리고 올해도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