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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다운 Jun 15. 2022

'지금'이라는 계절

나다운 지금을 바라보는 비법을 전해드립니다.

  당신, 무슨 계절 좋아해요?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 모든 색이 진해졌어요. 하늘과 풀, 꽃들이 색을 뽐내며 말을 건네는 것 같아요. 그려놓은 듯한 여름 구름은 어떻고요! 나는 여름을 좋아해요. 그런데 누군가 이 질문을 겨울에 했다면,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답했을 거예요. 사실 나는 사계절을 좋아하거든요. 봄이 되면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고, 갈색빛 풀밭에 연둣빛 새싹이 빼꼼 얼굴을 내미는 걸 보면 “봄이구나! 나는 봄이 정말 좋아”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색깔이 진해지고, 걸치는 점퍼의 두께가 날마다 얇아질 때, ‘여름이군. 수박이랑 옥수수를 동시에 같이 먹을 거야.', '이번 여름엔 냉면을 연속 며칠까지 먹을 수 있을까’ 하면서 잔뜩 기대합니다. 그렇게 신나게 수박이랑 옥수수랑 냉면을 먹다 보면, 어느새 높아진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져서 다시 얇은 점퍼부터 꺼내 입어요. 그래요, 가을이에요. 나뭇잎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말라서 바람이 불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 길가에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 발 밑에서 바스락하고 내는 소리도 좋아요. 그렇게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무들이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무렵엔 패딩을 꺼내 입어요. 그리고 산책에 나서면, 겨울 냄새가 나요. 코 끝이 시원하고 촉촉하고 얼얼한 냄새예요. 출근길에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겨울 냄새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와서 시원하게 해 줍니다. 살면서 나처럼 겨울 냄새를 맡는 사람은 아직 못 만나봤어요. 혹시 겨울 냄새를 아는 사람이 있나 궁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주네요. “아, 그건 냄새가 아니라 그냥 코가 시린 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너무 재미있어서 깔깔 웃어요.


  언제나 사계절을 좋아하면서 산 건 아니었어요. 나는 여름에는 겨울이, 겨울에는 여름이 좋다는 사람이었어요. 이 말은 여름에는 여름이 싫고, 겨울에는 겨울이 싫다는 말이네요. 게다가 봄과 가을은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미지근한 물처럼 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싫었어요. 맞아요, 나는 사계절을 다 싫어했던 사람이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도돌이표처럼 돌고 돌아옵니다. 계절의 변화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죠. 오히려 옷장 정리 같은 귀찮은 일도 함께 떠올라, 날씨 변화가 더 싫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나는 누군가 어떤 계절을 좋아한다고 하면, ‘쓸데없는 낭만파군’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답니다.


  내가 바로 그 ‘쓸데없는 낭만파’가 된 건,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시작되었어요. 떨어진 꽃잎 줍기, 민들레 홀씨 불어 날리기, 줄지어 가는 개미 관찰하기, 나무 그늘 아래 누워서 하늘 보기, 도토리 줍기, 눈 온 날에 첫 발자국 내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잘게 쪼개서 바라보는 아이가 즐거워 보였습니다. 불현듯, 나는 '왜 즐겁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아이와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내 머릿속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침에는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떠오르고, 밤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입니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고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아이는 왜 즐거울까.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뿐이었죠. 이 순간엔 누가 툭치고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신 차려" 정도가 되겠네요. 나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눈앞에 있는 아이가 하는 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러 뛰어가고, 느리게 기어가는 달팽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지난봄과 지금 봄은 분명히 같은 봄일 텐데,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같은 봄이라고 뭉뚱그리는 것 안에는 사실 무수한 것들이 숨어 있었을 겁니다. 그저 놓치고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일 테죠. 다섯 번의 봄을 만난 아이는 서른 번 넘게 봄을 만난 나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에게 배운 대로 온전히 지금의 계절에 머무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시선은 지금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내가 보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꽃, 색깔, 음식 같은 것도 떠오르고요. 각 계절마다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것도 감사하게 됩니다.


  지금을 살아간다는 것, 현재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선택들에 대한 후회,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함. 사실 이것들을 모두 놓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후회를 왼쪽, 불안을 오른쪽 주머니에 묵하게 넣어두고, 눈앞을 보고 걸어갑니다. 펼쳐진 것들을 느끼고 즐기고, 때로는 감당하면서 나아갑니다. 내가 원할 때는 왼쪽, 오른쪽 주머니에서 과거나 미래를 꺼내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돌아와야 합니다. 나는 지금처럼 지금에 머물러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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