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 3년 차, 남편이 박사과정으로 있던 중부의 한 대학타운에 살 때였다. 어느 날, 동네 친구가 애들도 놀릴 겸 밥이나 먹자며 몇몇을 초대했다. 밥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때가 마침 밸런타인데이 즈음이라 주제가 자연스럽게 선물로 이어졌다. 남편에게서 무슨 선물을 기대하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난 꽃이면 된다, 그래도 초콜릿은 받아야지, 난 하루 실컷 쇼핑할 수 있게 그냥 애기들이나 봐줬으면 좋겠다, 난 랩탑 하나 사달라고 벌써 이야기했다는 등 기대감에 찬 대화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나는 영혼 없는 미소만 얼굴에 걸어놓은 채 대화에 끼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번 달 집세를 내지 못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이번 주말까지 자동차 등록도 해야 하는데, 80불 정도 되는 등록비도 통장엔 없었다. 자동차 등록을 하지 못하면 차도 굴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꽃이고 초콜릿이고 다 필요 없고 어디서 돈다발이나 떨어지면 좋겠다. 작년에 맹장이 고장 나는 바람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하루살이처럼 간당간당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수술 한 번으로 한 순간에 몇 천불이 되는 돈이 날아가면서 가계부에 큰 구멍이 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실컷 놀다 지쳐 잠들어버린 애를 들쳐 엎고 집에 왔더니 전화기에 음성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아파트 오피스였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심호흡 한번 하고 아파트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아직 이번 달 집세를 내지 않았네?
- 그래, 미안. 사실 몇 달 전에 내가 맹장수술을 받으면서 병원비가 많이 나가서 형편이 좀 어려워졌어. 집세가 좀 늦긴 했지만, 곧 돈이 들어올 테니까 며칠 뒤에는 낼 수 있을 거야.
- 너희는 이번 달 집세 기한을 사흘이나 지나도록 내지 않고 있어. 이번 주말까지 내지 않으면 법원에 강제퇴거 신청할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여기 이 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집세 안 낸 적도, 늦게 낸 적도 없잖아.
- 그런 건 상관없어. 분명한 건 너희는 아직 이번 달 월세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런데, 너희는 돈 빌릴 친구도 없니?
- ......
- 암튼 난 이번 주말까지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때까지 돈을 구할 수 있길 바랄게. 아, 참. 그리고 퇴거에 따르는 법원 비용은 너희들이 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한 100불 정도 되려나 모르겠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수화기를 내리는 동시에 참고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느샌가 잠이 깨어 엄마의 표정을 살피던 두 살배기 딸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감지하고 내 품에 파고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칼바람 부는 2월. 엄동설한에 이 어린애를 데리고 정말 길바닥에 나 앉아야 하는가. 주말까지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집에서도 쫓겨나고 차도 굴릴 수 없게 된다. 눈앞이 캄캄했다.
일찍 들어온 남편과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오가는 대화는 한숨이 전부였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까. 눈 딱 감고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해볼까. 집에 내다 팔 물건은 뭐가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돈 나올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세간살이는 팔아봤자 100불도 채 안 될 것 같았고, 주위에 도움을 구하는 건... 그냥 하고 싶지 않았다. 가난한 인간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쫓아내면 쫓겨나지 뭐.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등등 온갖 아포리즘을 동원해 정신무장을 했더니 한숨은 남아도 용기는 생겼다.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결론은, 뭐 어떻게든 되었다. 기적적으로 그날 밤, 예전에 신청했던 장학금이 들어왔던 것이다. 원래 장학금이 들어올 날짜가 아니었는데 예상보다 일찍 지급되었다. 사실 몇 달간 형편이 빠듯해져서 장학금을 받고 있던 단체에 긴급구조요청을 해놓고 있었다. 장학금 지급일보다 두 달 먼저 지급해줄 수 있는지 어렵사리 부탁했다. 그러나 몇 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래,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수혜자 형편 따라서 당겨 받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쓸데없이 무리한 부탁을 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바로 아파트에서 쫓겨나기 전날 밤 기적같이 장학금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 살았다!
다음날 우리는 당당히 아파트 오피스로 쳐들어가 렌트비를 던지고 (라고 쓰고 ‘조용히 지불하고’라고 읽는다) 나왔다. 그날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 세상의 원칙을 배웠고, 아파트 매니저는 역시 세입자는 쪼으면 돈을 토해내게 되어있다는 교훈을 재확인했을 것이다.
‘돈이 전부가 아니야’라는 말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멋모르고 할 수 있는 말이다. 엄동설한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돈이 전부였다. 그깟 돈만 있었다면 멀쩡하게 살던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돈만 있었다면 너는 돈 빌릴 친구도 없냐는 말에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을 테니까.
그 당시 우리는 절박했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배가 덜 고팠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위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지는 않았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자존심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난의 쓴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겪었던 가난은 적어도 출구가 있는 가난이었다. '공부가 끝나면', '직장을 잡으면', 이라는 희망적 조건이 붙어있는 한시적 가난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난한 이들에게는 지긋지긋한 가난의 쳇바퀴를 벗어날 출구가 딱히 없을 뿐만 아니라, 빈곤은 대를 이어 재생산된다. 아버지의 가난은 나의 가난이 되고, 나의 가난은 아들의 가난이 된다.
한국처럼 미국에서도 교육이 계층이동 사다리로 기능하던 때는 이미 막을 내렸다. 물론 아직 그 가능성의 문이 아예 닫힌 것은 아니라 운이 좋은 누군가는 사다리를 타고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런 운을 타고나지 않는다. 조금 더 나은 직업을 갖고, 조금 더 괜찮은 동네에서 살려면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당장 오늘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은 사치일 뿐이다. 내 자식이라도 좋은 교육을 받았으면 바라는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술과 마약으로 찌든 거리에서 자라난 아이가 괜찮은 직업을 가진 ‘반듯한 사회 구성원’이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슬럼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안전한 동네로 옮겨가자면 월급의 대부분을 월세로 갖다 바쳐야 하는데, 그만큼 내 새끼 입에 들어갈 음식이 줄어들 각오를 해야 한다. 미국에서 가난한 가정의 상당수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하고 있다. 그중 적어도 4분의 1은 임대료와 공과금으로만 소득의 70% 이상을 바친다. 그런 상황에 저축을 할리 만무하고, 하루하루 버티며 무탈하게 사는 것만도 용한 일이다. 그러다 사고가 나거나 직장이라도 잃게 되면 한 달, 두 달 집세를 미루게 되고 기다리다 인내심이 바닥난 집주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강제퇴거 밖에 없다.
내 아파트 매니저는 우리에게 돈 빌릴 친구도 없냐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지만, 가난한 이에게 친구는 있더라도 돈을 빌려줄 만한 여유 있는 친구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 누군가 한 달치 월세가 되는 돈을 빌려준다 하더라도 가난한 이가 그 빚을 제때 갚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결국 그 곁에 남을 만한 친구들은 다들 고만고만한 경제적 능력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불평등은 점점 가속화되어 계층 안에서의 자리 이동만 가능할 뿐, 사다리를 타고 계층 간의 벽을 넘어 오르기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잘난 사람은 계속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도 계속 못난 대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