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사나요? " 나의 사명감
한낱 : 기껏해야 대단한 것 없이, 다만
한낱, 현대판 노비일지라도 행복해지기를 선택했다.
10대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왜 사나요? "
" 태어났으니까 살죠. 살기 싫을 때도 많고 . 공부나 열심히 해야죠 "
20대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왜 사나요? "
" 잘 모르겠어요. 뭐 지나보면 알겠죠. 취업이나 해야죠 "
30대가 되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왜 사나요? "
" 현대판 노비라도 기꺼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선택했습니다. 왜냐면, 설레는 일들이 많은 세상이니까요 "
당연히 책임질 일도 많아졌고, 그 무게도 무거워졌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빠져나와 모든 게 처음이라 용서받던 시절도 지났고 살아온 시간만큼 초보티를 벗어야하는 영역에 들어왔다. 그런데, 모든 것이 내 탓 같았던 그와의 헤어짐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어렵게만 보이던 좋아하는 일, 행복해지는 일 찾는 것도 하나씩 찾다보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선배로부터 조언을 들어도 직접 고통을 겪어보고 진통을 이겨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 1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이 될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질문에 대해 더 나은 대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 대한 사명감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물려받은 거액의 재산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는데 수백억의 사유재산을 사용하며 개인의 사명감을 다했고 ( 간송전형필 선생, 그가 지킨 훈민정음 해례본 ), 누군가는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휘어가는 허리에 진통제를 맞으며 빙판길을 휘저었고, 누군가는 앳된 학생의 얼굴로 자신이 살아가는 땅을 지키기 위해 만세를 외쳤다.
거창함을 기대하는 질문에 현대판 노비는 이렇게 더 나아진 대답을 하려고 한다.
" 왜 사나요? "
" 10년 뒤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내 몫으로 다가올 설레는 일들을 준비하며, 기꺼이 행복하게 살아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