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아, 망했다. 다시 살쪘다.
며칠 신경안쓰고 음주와 야식을 즐긴 결과다. 다시 내 눈에 필터가 씌워졌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메두사의 머리라도 되는 것마냥 보기 싫어지고 반인반수도 아닌데 내 몸은 통이 넓은 옷으려 가려버린다. 다시 그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초등학교는 산골마을이었다. 1~6학년까지 전교생 수를 다 합쳐도 120명 남짓. 서로의 형제자매는 물론 누가 싸웠고 화해했고 개인의 세세한 사생활까지 금세 소문이 나는 그런 곳이었다. 반은 1반 밖에 없었기에 6년을 매일 같이 보는 친구들과 서로의 성장과정을 함께 했다. 2차성징이 나타나고 사춘기가 시작되며 그 산골마을 아이들에게도 외모라는 것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집에서 30초만 걸어나가도 보이는 바닷가에서 동생들은 신나게 뛰어놀았지만 나는 방구석에 드러누워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선호했다. 살갗은 늘 하얀색이었고 3시 세끼 먹은 영양분은 다 소화되지 못한 채 잉여분으로 몸에 쌓이기 시작했다. 5학년이 되며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몸무게가 조금 더 나갔다. 성격도 조용했기에 나는 1순위 타깃감이 되었다. 놀림과 따돌림은 나를 향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집으로 향하는 통학버스에서 울다 지쳐 좌석에 쓰러지듯 누웠던 것을.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말했다. " 또 우네. 이번엔 누가 뭐라 한 거야? " 내가 잘못한 것 아무것도 없지만 그 당시 어느 권력보다 강했던 또래압력으로 나는 늘 아파했고 울었다. 나의 도피처는 나의 외모와 몸무게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조용한 도서관뿐이었다. 책들에 둘러쌓여 나만의 성벽을 쳤다. 그 성벽 안에서 나만의 이상향을 건설하고 질서를 만들었다. 폭풍 속의 심지는 그렇게 나를 지켜주었다.
꽤 오랜 시간.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이 고통은 이어졌다. 나를 흘깃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움찔했다.
' 쟤는 왜 저렇게 못생겼지? '
' 뭐 저렇게 뚱뚱해? '
' 으 쟤랑 놀면 안되겠다. '
나라는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시간에 갇혀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 옹졸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강생이 100명 가까이 되는 전공필수과목 발표가 있는 날. 남 앞에 서서 발표하는 걸 몸서리치게 무서워하는 나였지만 가위바위보에서 패한 결과 발표자로 선정되었다. 10분이 넘는 시간 안락사를 주제로 발표해야했다. 닳아 헤진 대본을 움켜쥐고 강단에 올라섰다.
단단해보이기만 하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은 그렇게 불시에 찾아왔다. 터질 것 처럼 박동하던 심장은 이내 차분해졌고 목소리의 떨림은 가라앉았다. 여유롭게 친구를 보고 웃으며 발표를 잘 마쳤다. 교수님과 제일 앞 줄에 앉은 선배는 말했다. " 발표 왜 그렇게 잘 해? "
덜덜 떨며 강단에서 내려와 오후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기숙사로 돌아와 마음 속 감정들을 마주했다.
' 어느누구도 나에게 못생겼다고, 뚱뚱하다고 비웃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서 꽤 자연스럽고 당당한 모습으로 발표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메두사의 머리도, 반인반수의 몸도 아닌 평범한 외모의 사람이었다. '
이 생각을 가지기 까지 6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쌍커풀 수술과 같은 자기계발(?)도 했고 살 빼기 위해 매일같이 아침 공복에 1시간 넘는 등산을 했다. 외모도 체중도 현저히 좋아졌지만 나 스스로에게 이 말을 건네기 까지 6년이 걸린 것이다.
" 나는 못생기지 않았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
서서히 과거와 화해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 발표는 내가 도맡아서 하게 되었고 나에게 맞는 립스틱과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동아리 회장도 맡고 직업도 강사가 되었다. 그리고 30대가 되어서는 열댓명의 사람들을 이끄는 커뮤니티 모임의 파트너가 되었다. 과거의 상처에 관한 주제가 나올 때 나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 아 맞다! 나 왕따당했었지! "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던 기억들은 어느샌가 나에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으로 바뀌있었다. 소심해서 발표도 못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면 멤버분들은 깜짝깜짝 놀랜다. 전혀 못 믿겠다는 눈빛과 함께.
신체적인 성장기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과거로부터 현재의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정싱적 성장기는 알게 모르게 20대를 관통하며 진행되어왔음을 30대가 되어서야 알게되었다.
이렇게 꽤, 아주 많이 과거와 화해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