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의 시대는 저물고
영화관을 나오며 진수가 한숨을 쉬었다. 왜 요즘에는 영웅다운 영웅이 스크린 위에 안 보이는 거람. 분명 기분 좋게 시간을 때우러 간 영화관이었는데, 나오라는 히어로는 나오지도 않고 건물 부서지는 장면과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장면만 반복되었다. 폭발도 한두 번 봐야 놀라지, 여러 번 나오면 질리기 마련이란 말이다.
진수는 다 식은 캐러멜 팝콘을 씹으며 영화를 고르던 과정을 회상했다. 히어로 영화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영화사에서 간만에 오리지널 신작을 냈다. 그 회사가 요새 폼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전성기 시절의 재미와 감동을 잊을 수 없었다. 한평생 영화와 거리를 두고 살았던 그를 영화관에 데려간 것도 그 회사 작품 아니었던가.
그래서 진수는 호기롭게 특별관 예매 버튼을 눌렀다. 동경만 하던 특별관에서 신작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영화관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5분은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개의치 않았다. 팬데믹 이후 몇 년만의 영화인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영화에는 고뇌하는 히어로도, 매력적인 빌런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념도 뭣도 없이 무식하게 건물만 부숴대는 빌런과, 그저 '사람들을 구해야 하니까' 싸우는 히어로만 있을 뿐이었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엔딩이 뻔히 보이는 영화를 특별관까지 와서 보다니, 슬슬 화가 날 지경이었다.
화룡점정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다. 빌런을 붙잡은 영웅은 착하게 살면 복이 오고 모두가 행복해질 테니 제발 반성하고 그만두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 대목까지 오니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는 건 히어로 영화인가, 아니면 교육방송인가. 동경했던 영웅은 팬데믹을 기점으로 전부 세상을 떠난 것인가?
순간 스크린을 향해 팝콘 통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드들었다. 하지만 내면의 도덕이 그를 막아섰다. 팝콘 통이 스크린이 아니라 앞사람 정수리에 맞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앞사람마저도 진수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살짝 들여올려졌던 팝콘 통이 서서히 내려갔다.
그리고 결말. 역시나 뻔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영웅은 악당을 물리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왜 그가 영웅인지, 영웅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뒤처리를 덜 한 것처럼 찝찝한 기분만이 남았다.
어느새 진수는 역 앞까지 도착했다. 전광판을 화려하게 장식한 영화 포스터를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 지하철이라도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역사로 걸어나왔다.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 영화를 보러 가는 것 같았다. 내가 말주변만 없지 않았어도 이들을 말리는 건데, 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