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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야 May 01. 2021

그날 구급차에선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

"119, 빨리 119불러!!"


잠자리에 들어가기 딱 5분 전이었다.

이제 막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말리던 나와 거실을 정리하던 남편. 그 사이에서 잠투정을 부리던 아이. 제발 물기만 좀 닦자고 애원하며 한숨을 내쉬었던 그때. '쾅'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찰나의 정적을 깬 아이의 울음소리. 황급히 들여다본 아이의 새끼손가락은 찢어짐, 그 이상을 넘어 '너덜'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미닫이문과 하얀 서랍장에 튄 빨간 피가 아이의 상태를 짐작하게 했다.


아이를 달래며 애써 침착한 척, 아니 사실은 그렇지 못한 채 남편에게 소리쳤다. 빨리 구급차를 부르라고. 평소 침착맨으로 불리는 남편 역시 허둥지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작은 손가락이 어떻게 될까 봐... 차마 수건으로 손가락을 쥐지도 못한 채 천 년 같은 10분의 시간이 흘렀다.


@unplash

 


"많이 찢어졌네요."

"이쪽 병원으로 확인해 볼게요"


하얀 방호복을 입고 각자의 역할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두 분의 구급대원분들이 비장한 전사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안심시키려 '삐뽀삐뽀 차 타볼까?' 소리 높여 말하는 내 목소리만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흘러나왔다. 토끼 눈을 한 채, 반 즈음 잘린 자신의 손가락만 보던 아이는 구급차에 탄 뒤에야 비로소 내 품에 편히 기댔다. 잠시 후, 까무룩 잠에 빠져든 아이를 보고서야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구급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황빛의 딱딱한 좌석.

각종 의료 장비로 가득찬 진열장.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들.

그리고 적막.



적막?

그랬다. 그날 구급차에서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



환자 이송 중이라도 응급 상황이 아니면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다는 것,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이 응급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됐다. 혹시 내가 다른 위급한 환자를 구조하러 갈 기회를 앗아간 것은 아닐까, 구급차까지 부른 건 너무 오버였나. 가뜩이나 요즘 바쁘실 텐데 내가 민폐를 끼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나는 진심으로, 도로 뒤편 어딘가에서 쫓아오고 있을 남편의 차량으로 순간 이동하고 싶었다.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제가 너무 놀라서..."

"아니에요. 놀라고 경황없이 움직였으면 오히려 아이도 진정하지 못했을 거에요. 병원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혹시 다음에도 이런 일 생기면 꼭 전화하세요."



따스한 위로를 건네던 구급대원은 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아이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손을 받쳐 주었다. 나를 대신해 병원 접수를 해 주었고, 대기석에 앉아 이름이 불릴 때까지 곁에 있어 주셨다. 후에 다시 병원에 오신 분은 X레이 촬영실까지 함께 들어와 아이를 달래주셨고, 의사 상담 후 병원에 관한 소견까지 나눠주신 뒤에야 본부로 돌아가셨다.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아이는 응급 수술을 받았고 며칠간 입원 후 퇴원했다. 한동안 차고 있던 반깁스에서도 벗어났다. 손톱은 아직 나지 않았고, 손가락 모양은 약간의 변형이 생겼다. 그래도 우리는 일상을 되찾았다.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려 힘들어하던 아이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아이는, 거리에서 구급차를 보면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들어서 내 보인다. 그날 밤,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지만 세 살배기 아이의 마음에 '삐뽀삐뽀' 차는 잊지 못할 울림으로 남은 것 같다.



전국의 모든 구급대원, 소방대원, 구조대원 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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