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흡혈박쥐는 위가 길고 가늘다. 식도마저 가늘어서 혈액 이외의 먹이는 취할 수가 없다고 한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신선한 포유류의 피를 빨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늘 운이 좋을 순 없다는 사실이다. 쫄쫄 굶어야 하는 날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운이 좋아서 배부르게 피를 빨아먹는 박쥐가 피를 게워내 쫄쫄 굶고 있는 동료에게 나누어준다고 한다.
상처 입은 동료나 새끼가 가라앉지 않도록 물 밑에서 받쳐주는 고래의 모습은 다큐멘터리에서 간혹 보긴 했지만, 미물이라고 여긴 흡혈박쥐도 이런 상호협력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어쩌면 우리가 모를 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협력'함으로써 생존력을 키워온 것인지도 모른다. 협력하면 생존에 훨씬 유리하니 말이다.
넌 제로섬 게임 '협력' - 인류 진화의 시작
경쟁은 제로섬 게임이지만 협력은 넌 제로섬 게임이다. 쌍방이 이득을 얻는다. 이걸 알기 때문에 인류는 '협력'을 통해 진화해 왔다. 물론 나의 호의가 되돌아올 수 있도록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우정'이라는 안전장치.
친구 사이에 유대가 깊어지면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친구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도움을 준다. 설령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하더라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정은 인류의 진화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에 대비하는 일종의 보험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머지 모든 동물과 비교했을 때 나타나는 예외적인 특징 한 가지, 바로 '상호작용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돕는 성향'이다. 다시 말해서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푼다'는 점이다. 그 친절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류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협력하면서 '문명'을 탄생시켰다. 물론 무임승차자가 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제어하는 장치와 협력과 이타적 행동을 장려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천연두
인류가 농사를 짓고 정착하면서 인구가 늘었지만
건강에 좋지 않았다.
식품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영양 결핍이 더 자주 발생했던 것이다.
농업으로의 전환은 또 하나의 부작용을 초래했는데 ‘악성 유행병의 창궐’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들은 가축을 사육했고
사람과 동물은 가까이 살았다.
그 가정에서 병원체가 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람도 감염시켰다.
전쟁은 악성 전염병을 퍼뜨리고 유행을 촉발했다. 최초의 유행병으로 기록된 아테네 역병이다.
스파르타와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됐을 무렵, 역병이 아테네를 덮쳤다.
그 후 전염병은 역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디면서 신세계 정복과 식민지화와 약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에스파인과 포르투갈인의 대륙 탐험은 전 세계적인 천연자원의 재분배를 촉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생물의 재분배도 일어났다. 유럽인이 신세계로 들여온 천연두가 원주민 사이에서 맹위를 떨치면서 아즈텍 문명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럽의 정복자들이 기술적으로 앞선 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결정적 요소는 무기가 아니라 '전염병'이었다. 인구 600만 명의 아즈텍 제국과 인구 1000만 명의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천연두였다.
알코올과 카페인, 니코틴, 아편
인류는 마음상태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특정 물질을 의도록적으로 섭취한다. 이는 전 세계 모든 인간문화의 보편적 특징이다. 우리 뇌가 기능하는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킨 네 가지 물질, 바로 '알코올과 카페인, 니코틴, 아편'이다. 알코올과 아편은 억제제인 반면 카페인과 니코틴은 자극제(흥분제)이다.
오늘날 차와 커피는 일곱 대륙 모두에서 열정적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심지어 국제우주정거장(ISS)에도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데, 농담 삼아 이스프레소 메이커(ISS presso maker)라고 부른다. (...) 산업혁명의 공장들에서 증기기관을 돌아가게 한 것은 석탁이지만,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들에게 연료를 공급한 것은 동인도 회사가 공급한 차와 거기에 단맛을 추가한 서인도 제도의 설탕이었다.
커피 재배지는 전 세계에서 약 1000만 헥타르를 차지하고, 차와 담배 재배지는 각각 약 400만 에이커를 차지한다.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옷을 만드는 섬유도 아닌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이토록 많은 땅이 쓰고 있다니... 놀랍다.
루이스 다트넬의 <인간이 되다>는 8가지 주제어로 인간이 진화하고, 경이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문명을 위한 소프트웨어, 가족, 감염병, 유행병, 인구, 마음을 변화시키는 물질, 코딩 오류, 인지편향'이라는 주제어를 놓고 인간이 그리고 인류가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이 사회와 경제, 전쟁을 어떻게 야기하고 만들었는지를 거대한 역사를 통해서 펼쳐 보인다. '겨우 그런 이유로' 어이없었다가 '인간이 정말로 그렇다고' 충격받았다가 '그렇구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