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와 사춘기의 격돌 2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셀 수없이 많은 거절을 당했다.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절을 당했으면 이제 면역이 생겼을 법도 한데 거절을 당하면 여전히 아프다.
"싫어!"
딸의 SNS를 팔로잉하고 싶다고 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 왜?"
"정말 몰라서 물어?"
모르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섰다.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 직장상사나 시어머니가 들어오려고 하면 나도 정말 싫었을 테니까.
나는 왜 딸의 SNS가 궁금했을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딸의 생활을 다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이집에만 가기 시작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생겨나게 된다. 아이가 자랄수록 그 영역은 점점 더 커지고, 그 영역이 커질수록 덩달아 걱정도 커졌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상처입지나 않을까? 위험한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나 자신을 그리고 딸을 믿지 못해서 하는 있는 걱정이라는 것을. 엄마가 언제나 제 편이고,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전전긍긍하지 않을 것이다. 강요하지 않아도 엄마에게 달려올 것이다. 또 사리분별조차 못하는 사람으로 키우지 않았으니 위험하거나 비상적인 행동을 함부로 하지도 않을 것이다. 걱정을 할 게 아니라 믿음을 키워야 했다. 믿을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거절도 아프고, 거절이 가져다준 깨달음도 아팠다.
그나저나 설마 아니겠지? 어릴 때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고 울 때 안 된다고 거절했던 것.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배탈 난다며 거절했던 것. 옷 사달라고 했을 때 집에 쌓인 것이 옷이라며 거절했던 것 등등. 내가 행했던 수많은 거절을 기억하고 있다가 사춘기를 빙자하여 복수하는 것은 아니겠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왠지 내가 과거에 뿌린 것을 지금 거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많은 '안돼'로 아이를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자녀에게 가장 많은 거절을 하는 사람이 엄마인 것은 아닌지 급반성하며 이제부터라도 NO 대신 YES를 입에 달고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친구들이랑 여행 가겠다고 했을 때 A4 지를 빼곡하게 채운 여행계획서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허락해 줬고,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했다가 애쉬 블론드로 바꿨다가 쨍한 오렌지로 염색을 해도 '오냐, 지금 다 해라' 하는 심정으로 허락해 줬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니 흔쾌히 OK이 했던 이 시간들은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