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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문 Aug 15. 2023

잠긴 문 앞에서 받은 1시간의 선물

선물을 받아들이는 법


저녁 약속이 있었다. 잠시 도서관에 들러 책을 찾아보고 갈 생각으로 30분쯤 일찍 집을 나섰다. 아뿔싸, 도서관 휴관일이다. 약속한 사람이 늘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니 조금 일찍 가도 되겠지 싶어 그대로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그의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카톡을 받았다. 갑자기 일이 생겨 30분쯤 늦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예정보다 30분 일찍 도착했고, 그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늦는다고 하니 예정에도 없던 시간이 1시간 생겨버렸다. 지문 인식으로 열리는 문이어서 들어가서 기다리기도 힘든 상황이었기에  16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잠시 망설였다. '다시 내려가서 근처 카페를 갈까? 아니면 여기서 그냥 기다릴까?' 창문 밖을 내다보는 순간, 나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작은 테이블 하나와 의자 2개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자 창문을 열자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기분 좋을 정도로 선선했고,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노을은 가슴 뭉클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잠시 바람과 노을을 만끽하다가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소개받았던 책 박웅현 씨의 <문장과 순간>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 지금 이 순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글귀를 발견했다. (책에서는 아침 해를 말하고 있었고  내가 본 것은 저녁해였지만, 둘 다 기적임이 분명하고 아름다움임이 분명하다.) 꼬여버린 약속 시간 때문에 느닷없이 생긴 1시간은 선물이었다. 



이렇게 가끔씩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받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의 가치는 오직 나만이 정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생긴 1시간을 선물로 받아들이면 선물이 되고, 짜증으로 받아들이면 짜증이 된다.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나를 향해 욕설을 했을 때, 욕설로 받아들이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내 입에서도 험한 말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의 것이 되고 만다. 

"당신 집에 손님이 오면서 선물을 가져왔는데, 당신이 받지 않으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야 가져온 사람의 것이지."
"당신이 나한테 욕을 선물했는데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 것입니까?"


거부하는 것 역시 넓게 보자면 '잘 받아들임'의 한 방법일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나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잘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며, 나는 오늘도 근사하게 나이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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