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오래전, 친구와 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무속인이 했던 말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내가 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정보도 제공해 주세요. 어차피 시간 쓰고, 돈 써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 얼마나 잘 맞추는지 보자는 식으로 앉아 있는 건 바보짓입니다."
맞다. 만남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천하의 바보짓이다. 흔히 상대방의 수준에 의해 '만남의 질'이 결정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누구를 만나든 배울 점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음을 닫고, 귀를 닫은 채 만나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을 만나도 소용없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경북 영천 은해사 운부암에 가을이 찾아왔다. 지난 일요일부터 5일째 운부암에 머물고 있다. 은해사에서 꼬불꼬불 포장도로를 따라 7~8분 정로 차량으로 달리면 운부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를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바로 원통전 마당이고, 돌계단 위로 '보화루'라는 누각이 있다. 보화루에는 누구나 편히 앉아 창밖으로 가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매일 같이 꽤 많은 관광객들이 운부암을 찾아왔다가 휘리릭 경내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는 다시 내려갔다. 그중에 자그마한 소풍 바구니를 들고 올라온 두 여성이 있었다. 보화루 창문 앞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간이의자 하나에 테이블보를 씌우더니 앙증맞은 바구니 속에서 예쁜 찻잔 두 개와 차와 같이 즐길 청포도를 담은 그릇과 우엉차를 담아 온 보온병을 차례대로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가을 풍경 앞에서 차를 나눠 마시며 작은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보기 좋았다. 가을을 만나러 오는 그들의 자세도, 가을풍경 속으로 들어간 두 사람의 모습도.
가을 풍경을 즐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사람들과 물 한 병도 없이 후다닥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 그들이 만난 운부암의 가을을 사뭇 다를 것이다.
어디 가을뿐일까?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만나든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나면 그 만남의 질은 결코 만족스러울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에 무릎이 튀어나온 후줄근한 운동복을 입고 나가거나 인터뷰를 하러 갈 때 인터뷰이에 대한 아무런 조사나 공부 없이 나가면 그 데이트나 인터뷰는 이미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상가상 편견으로 눈을 가리고 고정관념으로 마음을 가리면 아니 만나느니 못할 수도 있다. 누구를 만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만나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