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말해주는 것들
나는 걷는 것을 꽤 좋아하지만, 나의 발은 의욕을 따라오지 못한다. 오래전 5박 6일 동안 제주 올레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제주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고맙게도 날씨도 좋았고, 제주의 음식도 맛있었고, 10대였던 딸도 좋은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단 한 가지, 나의 발이 문제였다. 새끼발가락이 많이 휘어있어서 그런지 조금만 걸어도 새끼발가락 쪽에 물집이 잡힌다. 첫날 새끼발가락 쪽에 생긴 물집은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물집이 생긴 아픈 부위를 피해서 다른 곳에 힘을 주어 걷다 보니 자연히 다른 곳에 물집이 또 생기는 악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발바닥에 성한 부위가 없을 정도였다.
해외여행을 할 때도 늘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저기 골목길을 거닐고 가게를 구경하고 공원을 산책하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걷는 양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물집이 생기기 시작하고, 귀국할 때쯤에는 발바닥이 엉망이 된다. '새끼발가락이 기형적으로 생겨서 그런가 보다' 평생 껴안고 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참고 살았다.
지난 주말에 등산화를 사러 갔다. 설악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 '봉정암'에 오르기 위해 등산화를 새로 장만하려고 매장을 찾았다. 스포츠 의류 매장의 매니저에게 새끼발가락이 많이 휘어있고, 조금만 걸어도 발바닥에 쉽게 물집이 잡히는 나의 발 상황을 열심히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매니저는 일단 발 사이즈부터 확인해해 보자며 '발 사이즈 측정기'를 내밀었다. 오른발과 왼발을 모두 측정했다.
"신발 사이즈 몇 신어요?"
"245요"
"고객님은 오른발과 왼발이 짝발입니다. 오른발은 250. 왼발은 255입니다."
이럴 수가. 20년이 넘도록 나는 나의 신발 사이즈를 엉터리로 알고 있었다. 짝발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한 번도 발 사이즈를 제대로 측정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내 발사이즈가 245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까? 운동화를 사러 가서 몇 켤레 신어보고 "245 신으면 되겠네요"라는 어느 매장의 직원 말을 들은 이후로 쭉 그렇게 신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250을 신으면 헐렁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유였다.
"250을 신으면 발이 신발 속에서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어요."
"발 길이에 비해서 발에 살이 없어서 그래요. 큰 발에 신발 사이즈를 맞추고 끈으로 조절을 해야 됩니다."
매니저는 내가 신고 온 운동화를 뒤집어서 바닥을 살펴보더니 나의 걷는 습관까지 집어냈다.
"성격이 굉장히 급하시네요. 말을 조근조근 해서 성격 급한 줄 몰랐는데, 신발 바닥을 보니까 엄청 급하시네요. 100미터 달리기 하는 사람처럼 발가락 부분이 먼저 닿아서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닳았습니다. 그리고 왼쪽 골반이 살짝 틀어져서 오른발과 왼발의 균형이 깨져 있습니다. 뒤꿈치가 먼저 닿도록 바르게 걷는 연습을 하는 게 좋습니다."
내 신발이 무언으로 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미리미리, 빨리빨리 해야 마음이 편한 성격인지라 그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다. 나이가 들면서 제법 느긋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지금도 딸과 걸을 때는 "엄마 천천히"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와 신발은 별개로 존재하지만, 오래 사용하다 보면 성격이 스며들게 된다. 간혹 사람들이 사용하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혹은 읽고 있는 책을 보면 그의 성격이 짐작될 때가 있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의 바탕 화면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갖 앱과 파일로 정신없는 경우도 있고, 책에 밑줄 긋거나 접거나 하는 것이 싫어서 새책처럼 깨끗하게 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메모까지 해가면서 보는 사람도 있지 않다. 사용자의 성격이 스며든 흔적들이다. 그렇게 물건은 그 사람을 말해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때는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가만히 살펴보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가장 솔직한 답을 해줄 것이다. 어쩌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ps. 등산복 매장 매니저가 알려준 신발끈 묶는 법과 등산 중 휴식법
"신발끈 앞부분은 살짝 느슨하게 묶고 발등부터 당겨서 묶고 발목 쪽은 단단히 조여줘야 하산할 때 발가닥이 앞으로 밀리는 것을 막아주고 발목도 보호해 줍니다. 그래야 발가락이 아프지 않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양말은 반드시 울양말을 신으시고요. 등산 중에 쉴 때는 꼭 신발을 벗고 가능하면 양말까지 벗고 발을 주물려 주면서 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