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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 Oct 24. 2021

무명작가의 유명한 일기

어느 낡은 자개장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행운을 꼽으라면 문제의 강연에서 호랑이 경장님을 뵈었던 날을 선택할 것이다. 무명작가가 쓰는 작품의 결을 바꿔놓기도 했지만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안전하고 편안했는지에 감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강의를 듣게 된 건 꽤 충동적이었다. 로맨스 위주의 작품을 써오다 범죄물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일천한 지식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침 공개 강의가 있어 신청을 했고 운 좋게 나는 강연자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꽤 오래 전의 일임에도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건 낡은 자개장 사진이다.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살면서 한 번쯤은 봤음직한 익숙한 디자인의 자개장. 검은 바닥에 동양화풍의 자개문양이 복잡하게 올라붙은 그 자개장 아래로 평범한 할머니 한 분이 피살된 채 찍혀있던 사진은 무명작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날 것의 사건 현장.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없이 봤음직한 사건 현장이 일상으로 들어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방 안의 풍경도, 할머니의 차림새도, 제대로 치우지 못한 방안의 모양새도, 모든 것이 너무나 내 것 같았다. 어쩌면 몇 년 전, 아니면 몇 년 후, 어디선가 마주칠 수 있는 공간에서 피살자를 본다는 건 오히려 낯 선 경험이었다. 호랑이 경장님은 해당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범죄 현장에서 과학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호랑이 경장님은 꽤 유쾌한 사람이었다. 말재주도 좋았고 열정도 넘쳤다. 고백하건대 그날 강연에서 주어진 시간을 다 써버린 경장님은 점심시간에도 사건 이야기의 꼬리를 풀어내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던 기억이다. 


어쨌거나 그날 호랑이 경장님의 강연은 여러모로 놀라웠다. 증거물을 감식하는 방법이나 사건 현장 보존이 중요한 이유, 법보행 분석, 시체 현상, 영상 분석법, DNA 감정에 대한 것이나 사건 사례 등이 차례로 이어진 강연은 매우 유익했지만, 내 마음을 흔들었던 건 이 직업을 대하는 경장님의 자세였다. 짧은 강의를 듣는 동안 한 인간을 저렇게 치열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내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에 대한 마음에는 진정성이 느껴졌지만 증거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 감정에 눈에 흐려지지 않았다. 사건에 매달려 일상을 포기해야 했지만 말끝마다 직업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더군다나 호랑이 경장님의 행보가 가능하려면 끝없는 공부가 따라붙어야 했다. 기술은 계속 변하고 범죄수법 또한 끝없이 진화한다. 그런데 경장님이 수사해 온 이력을 따라가 보면 그 어느 순간도 뒤처지거나 소홀한 기간이 없다. 현장에 투입되고 사건을 분석하는 일조차 버거울 텐데 그 많은 공부는 또 어떻게 해내는 걸까? 과연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단지 공명심 때문일까? 저분은 공명심을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신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물음표에 대한 답은 오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라지 마시라.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경장님은 무명작가 친오빠의 가까운 지인이었다. 무명작가는 아주 오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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