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물이 갑자기 차졌다. 추석이 지나도록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요즘이다. 한결 시원해진 바람이 반갑지만, 이 좋은 시기는 또 쏜살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겠지.
지난 몇 개월간 온수와 냉수 중간 어디쯤 온도를 맞춰놓고 샤워를 했었다. 가끔 아예 냉수를 틀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물이 그렇게 차갑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런데 이번주는 확연히 다르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찬물에 오소소 돋아다는 닭살을 피하려면 물온도가 확실히 온수 쪽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그것도 시작할 땐 찬물이 쏟아지기 마련이라 몸은 뒤로 쭉 빼고 손만 먼저 적셔보며 물의 온도를 체크하고 샤워를 시작했다.
자유형과 배영을 익혔으니 그다음은 평영의 차례다. 수영을 시작한 지는 어느새 4달 정도가 되었다. 아직 자유형도, 배영도 완벽한 자세로 통달했다 할 수 없으니 계속되는 자세교정과 반복 연습 속에서 조금씩 평영의 시간을 늘려가는 방식으로 수업은 진행되고 있다. 자유형도 그랬지만, 평영은 정말 쉽지 않다. 처음 평영 발차기를 배우기 시작한 게 벌써 두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아직도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발차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숨쉬기다. 평영의 숨쉬기는 자유형처럼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 위로 드는 것인데, 안 그래도 숨쉬기를 어려워하는 내게 적절함을 넘어선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선생님은 늘 차분하다. 하루에 몇 개의 수업을 진행하고, 심지어 그걸 일주일 내내 하며 계속 똑같은 말을 할 텐데 지치지 않는다. 저런 게 프로의 자세일까. "근육을 안 쓰던 방식으로 사용하는 움직임이니까 잘 안 되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그래도 계속하셔야 합니다. 근육이 이 동작에 익숙해질 때까지요."
그리고 오늘, 그리도 어렵던 평영의 손동작 + 숨쉬기 콤보가 조금 편안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평영 손동작과 숨쉬기 때문에, 아침까지만 해도 나의 수영의 역사는 여기까지가 아닐까 하던 중이었다. 안 그래도 물도 이렇게 차가워지는데 그만둘 때가 됐지. 그렇다면 언젠가 또 친구들과 수영장에 놀러 가서 나는 자유형과 배영만 지겹게 하다 와야 하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단 자유형을 익히고 나면 그다음 단계는 쉽게 나가는 것 같던데 나는 또 왜 이렇지. 언젠가 다시 수영을 시작할 때, 선생님한테 어디까지 할 줄 안다고 말해야 할까 등등 쓸데없는 생각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물속의 내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보인다. 내 몸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래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쭉 뻗어있는 양손이 멀어지며 물살을 가르고, 고개를 위로 들기 쉽도록 몸 쪽으로 물을 모으고, 숨을 쉬고, 다시 고개가 들어가는 순간 쭉 뻗어 나가는 팔. 지금껏 안 되던 손동작이 조금 익숙해지면서 숨쉬기를 위해 고개가 물밖으로 나오는 과정까지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아직 수영을 더 하라는 신호인가 보다.
아무튼 오늘의 평영은 여기까지. 발차기까지 합체하여 연속 동작으로 해보려니 머릿속에서 순서가 뒤엉켜 상체와 하체가 따로 논다. 익숙하지 않은 근육들의 뚝딱거림이 딱 이런 느낌일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또한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오겠지.
수영을 배운 지 4개월이 되었다는 건, 회사를 그만두고 쉰 기간이 그만큼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동안 수영 말고 무얼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 된다. 계속 무언가를 하고는 있었지만, 스스로도 명사화할 수 없는 어떤 시간들의 나날이었다고나 할까.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거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제 내 주변에 더 이상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좋든 싫든, 자기에게 맞든 아니든,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을 좋은 결정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밖에 없을까? 안 맞는 옷인 것 같았지만 원하는 옷도 없었기에 10년도 넘게 그 옷에 맞추려 노력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 남들이 만들어 놓은 뻔한 길은 싫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요리조리 샛길을 걸어봤는데 돌아보니 혼자 제자리에 멈춘 것 같은 사람.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에 힘을 쓰다가 이제 와서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걸 위해 힘쓸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어 버린 사람.
수영을 하고 나면 남은 시간 무얼 하냐고들 묻는다. 요새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 앞에 앉아서 진득하게 글 쓰는 시간을 가져보고 있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더니, 작정하고 앉아있지 않으면 정말로 한 글자도 안 써진다. 그러고 보니 앉아 있는 것도 결국 근육이겠지. 퇴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진득이 앉아있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엉덩이에도 머리에도 자꾸만 쥐가 나려고 한다. 이것도 근육이 익숙하지 않은 걸까요?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질까요, 선생님? 왜, 난, 그때는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노력은 했는데 방법을 몰랐을까요? 지금이라도 알았다면 되는 걸까요? 과연 나는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