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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l 25. 2018

21. 무지개빛 오르노깔을 함께 간 그 강아지는

2017.5.6. 우마우아까, 아르헨티나(D +89)

이 여행기가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라 한다면 우마우아까에서 만난 이 녀석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눈치 따위 모르는 천진난만함, 가끔은 자존심도 없는 듯 한결같고 끝도 없던 대시, 그런 그를 향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헤어질 때 쿨하게 돌아서던 모습까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던 한 친구를 소개한다.



여전히 안데스 산맥을 벗어나지 못한 아르헨티나의 북쪽. 이곳의 작은 마을인 우마우아까는 온종일 건조한 모래바람, 한낮에는 강렬한 햇빛, 그리고 해저물녘이면 어스름 속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는 곳이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낮고 투박한 건물들과 바닥에 돌이 깔려 있는 골목, 그렇게 이곳은 큰 특징도 없고 할 일도 많지 않은 조용한 동네였다. 여행자들이 왜 굳이 이곳에 몇날 며칠 머물지 않고 당일 치기 투어로 다녀가는 지도 알만 했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일어나면 아침을 해 먹고, 시장을 봐서 점심을 해 먹고, 숙소에서 뒹굴거리거나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저녁을 해 먹는 게 일상이었다. 호스텔 주인이 너희 4명 모두 매일 주방에서 사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는 이 모든게 퍽 마음에 들었는데 여기에 뜻밖의 변수가 등장하며 자칫 밋밋할 수도 있던 생활이 더 활기를 띠게 됐다. 그건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동네 강아지 휘또였다.  


우마우아까에서 만난 우리의 친구. 휘또.


휘또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낯의 길거리였다. 시장을 보고 슈퍼를 들려 이것저것을 사는데 언제부턴가 곱슬곱슬한 털의 하얀 강아지가 우리를 쫓아다녔다. 보통 지나가는 강아지들을 보고 예뻐하듯이 그랬던 것 같은데, 왜 인지 그때부터 이 녀석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마을을 돌 때면 졸래 졸래 쫓아오던 휘또는 우리가 호스텔에 들어가면 문 밖에 가만히 앉아서 다시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언제 집에 가서 언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도 호스텔 문을 열고 나가면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우리를 맞이했다. 호스텔 주인은 언제부턴가 “문밖에 너네 강아지 와있다”는 말로 우리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잔뜩 사서 호스텔 뒷마당에서 아사도를 굽던 날, 휘또는 마침내 호스텔 안에 들어와 주방을 포함한 2중 3중의 문을 뚫고 우리가 있는 뒷마당까지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때 고기를 너무 잘 먹여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휘또는 우리 호스텔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한 번은 언제 어떻게 들어온 건지 닫힌 우리방 문 앞 복도에 기척도 없이 앉아있는 녀석을 발견한 적도 있다. 어떤 날에는 용케 방까지 들어와 침대 밑에 숨어있다가 들키기도 했다. 강아지라기엔 조금 큰 데다 털도 많이 빠져서인지 호스텔 주인은 휘또가 들어오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는데 그래도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호스텔에 들어오려는 휘또를 막는 것, 몰래 들어오는 데 성공한 휘또를 다시 몰래 문 밖으로 내놓는 일은 우리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휘또 덕분에 동네 사람들, 특히 꼬마들과도 가까워졌다. ‘휘또’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도 그렇게 알게 됐다. 모두가 우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하얀 개를 휘또라고 부르며 아는 체를 했다. (알고보니 휘또란 '와우wow'라는 뜻이었다.) 들리는 이야기에는 주인도 집도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도 정확하게 휘또가 어디에서 누구와 사는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마을이 전부 휘또의 집이었던건 아닐까?

호스텔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김없이 우리를 쫓아다니던 휘또는 심지어 차에 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근 마을인 틸까라와 이루샤에 가던 날에는 버스까지 쫓아 올라오는 바람에 떼어 놓고 가느라 출발 직전까지 W가 버스에 타지 못하고 휘또의 주의를 돌려야 했다. 택시를 타고 오르노깔 산책을 갈 때는 택시에 올라타 목석처럼 버티는 통에 아저씨의 허락을 받아 기어코 함께 다녀왔다.  


무지개빛 오르노깔, 그리고 휘또.


일명 무지개 산. 오르노깔은 서로 다른 색을 품고 켜켜이 쌓여있던 과거의 지층들이 지각변동으로 인해 뒤틀려 솟아오르며 만들어진 천연 무지개 빛 산이다. 이 독특한 지형은 남미에 몇 군데가 있어서 최근 주목받는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으로는 쿠스코의 비니쿤카가 있다. 걷거나 말을 타고 정상까지 오르는 당일 트레킹이 있는데, 5천 미터가 넘는 높이에 정상을 향하는 길도 궂어 다녀온 모두가 힘들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볼 만큼 매력적인 코스라고 한다. 물론 트레킹을 싫어하는 나는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 아르헨티나에 오면 택시를 타고 누구보다 편하게 무지개 산을 보고 올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눈앞에 들쭉날쭉하게 펼쳐진 땅의 색은 정말 다채로웠다. 강하고 거친 질감에 그림으로 비교하자면 마치 유화 같은 산. 그리고 그 위로 펼쳐져 있는 부드럽고 잔잔한 마치 수채화 같은 하늘.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가지 기법이 혼재된 풍경은 그 외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데도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마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 것은 처음이었는지 휘또도 신이 나서 그 그림 속을 뛰어다녔다. 우리 중 제일 좋아했던 W의 뒤를 쫓아다니며 뛰는 모습은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가 되었다.



우마우아까를 떠나던 날, 호스텔 주인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문밖에 너네 강아지 와있다”고 했다. 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떼어놓고 갈까, 또 같이 버스에 올라타면 어떡하지, 우리가 영영 떠나는 길이라는 걸 알까,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건만 휘또는 알았던 걸까? 아니면 원래 이렇게 쿨한 녀석이었던 걸까. 버스 터미널 근처, 휘또를 보고 예쁘다 하는 지나가던 커플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작별 인사도 없이 그들을 따라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후기를 하나 더 말하자면, 다음 목적지였던 살타의 호스텔에서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우마우아까에 당일 투어를 갔을 때 하얀 강아지와 함께 다니던 동양인 일행을 봤다고 하더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던 우리 강아지 휘또. 하루 잠깐 놀러 온 사람이 봐도 우리 강아지였던 휘또. 지금은 또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지내고 있겠지? 우리는 아직도 가끔 휘또를 떠올리며 보고 싶어 하는데 휘또도 그곳에서 그럴지 문득 궁금해진다.



* 우마우아까와 오르노깔 산맥 
우마우아카(Humahuaca)는 잉카제국은 물론 선사시대의 흔적도 가지고 있는 오래된 도시다.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는 이 일대의 협곡을 마을의 이름에서 그대로 가져와 우마우아카 협곡(Quebrada de Humahuaca)이라고 부른다고. 이 지역은 오랜 시간 아르헨티나 북서쪽 교통의 요지이자 근방의 경제, 사회문화적 중심지였는데 19~20세기 독립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 오랜 역사성과 문화성 등을 인정받아 우마우아카 협곡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우마우아카 협곡의 무지개빛 오르노깔 산맥(Serranía de Hornocal)은 마을에서 택시를 타고 약 30분이면 갈 수 있다. 해발 4,350미터. 32개의 봉우리, 16가지 색깔을 품고 있다는데 산맥의 다채로운 색은 땅 속 광물들이 가진 고유한 색으로, 2010년 <EBS 세계테마기행>에 따르면 오래 전부터 많은 회사들이 이곳의 광물을 채취하려고도 했지만 정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알고 갔으면 더 좋았을까 싶은, 뒤늦은 마을 공부. (2018.7.27.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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