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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또 Mar 24. 2023

발자국

먼저 걸어간 그 발자국

어릴적 따라가던 그 발자국이 생각난다. 먼저 걸어간 큰 발자국을 꼭 따라 밟았다. 깊게 파인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야 안심이 됐다. 먼저 가 만든 그 발자국을 그대로 밟았다.


외할아버지 발자국 이야기다. 여름방학이 되면 시골 외갓집으로 향했다. 짧게는 3박4일, 길게는 1~2주 정도 시골집에서 지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농사일을 하셨고, 존재만으로도 손녀를 향한 사랑이 전해졌다.


키가 180cm는 훌쩍 넘는 외할아버지를 쫓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외할아버지는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데리고 논밭을 거닐었다. 가끔 외할아버지 경운기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이따금씩 잠자리도 잡았다. 잠자리 날개 아닌 꼬리를 잡는 법도 배웠다.


모내기가 끝난 뒤였을까? 논 위의 질펀한 흙 위를 거닐면 발이 푹푹 들어갔다. 하지만 외할아버지 뒤를 따라가면 걱정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앞에서 먼저 걸어가며 푹 눌러놓은 발자국 위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됐다. 외할아버지는 묵묵히 앞에서 발자국을 만들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80cm가 훌쩍 넘는 키의 외할아버지 보폭을 어린 내가 어찌 따라 밟았을까 싶다. 다리를 쫙쫙 벌리지도 않았고, 깡총 뛰지도 않았다. 그러고보니 외할아버지 보폭은 내 보폭에 맞춰 있었다.


지금에야 알았다. 먼저 걸어간 그 발자국이 나를 생각한 발자국이었다는 것을. 티내지 않고, 조언 하나 보태지 않고 그저 행동으로 어린 손녀 보폭에 맞춰 발자국을 만들어냈다. 이제서야 알게 됐다.


외할아버지는 먼저 떠나셨지만 그 때 그 발자국이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게 한다. 외할아버지 존재 자체가 내게 발자국 같았다. 멀리 살아 자주 보지 못해도, 티 내지 않아도 그의 사랑이 느껴졌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싶었고, 그러면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으면서도 외할아버지의 발자국은 내게 큰 안정감을 준다. 그가 묵묵히 걸어간 인생의 길을 나 역시 따라가고 싶다. 그저 그 때 본 외할아버지의 발자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드는걸 보니 참 깊게도 다져놓은 발자국인가보다. 


나도 누군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발자국을 다져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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