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이 Nov 17. 2022

남편의 회식이 늘었습니다.

주말부부로 지내던 시절, 남편은 온갖 회식에 다 불려 다녔던 모양이다.  


"너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잖아."

"잔소리하는 부인도 없는데 그냥 나와 마셔."

"저녁 안 먹었지? 나랑 술 한잔 하자."


사실 떨어져 살던 시절에는 남편이 회식을 하든 안 하든 별 상관이 없었다. 내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취해서 귀가하는 꼴을 볼 일도 없고, 어차피 아이를 재우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언제나 나 혼자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정확히 몇 시에 귀가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영상통화나 문자로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한동안 남편은 칼퇴근을 하며 나와 아이를 챙겼다. 떨어져 사는 동안의 아쉬움을 채우기라도 하듯 매일 일찍 귀가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나를 걱정해 저녁 외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랬던 남편이 요즘 들어 부쩍 회식이 많아졌다. 술을 먹는 건 좋다. 그런데 이놈의 남편은 술만 먹으면 연락이 두절된다. 수십 통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문자를 보내도 읽지 않고 소식이 끊겨버린다. 그러니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초조해진다. 


어릴 때 엄마는 아빠가 술에 취해 연락이 되지 않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잠들지 못하고 씩씩대며 아빠를 기다리셨다. 어린 나는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누워 숨죽여 있을 때면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술에 취한 아빠가 들어오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럼 아빠는 언제나 나와 내 동생을 일으켜 세워 잘잘못을 따지는 긴 토론을 시작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술에 취한 아빠의 설교를 듣는 일도 잔소리하는 엄마를 견디는 일도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 때 나는 결심했었다. 나중에 크면 술 못 먹는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그 결심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때의 엄마, 아빠의 마음을 이제는 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엄마의 마음, 가족이라는 짐이 무거워 한 번씩 술로 달래야 했던 아빠의 마음을 말이다. 그리고 나도 그때의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린다. 우리 남편의 마음도 그때의 내 친정아빠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쓰럽다. 




여전히 술냄새를 풍기는 남편에게 아침밥을 차려주며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각서라도 쓰라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남편이 나를 쳐다봤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올 수도 있지. 이해해. 대신 몇 가지만 약속해줘. 그럼 나도 잔소리 안 할게."


첫째, 12시를 넘기지 않을 것

둘째, 회식은 한 달에 세 번을 넘기지 않을 것


이 약속만 지켜준다면 나도 내 불안은 스스로 다스리며 남편을 기다려 볼 작정이다.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도 결국은 집을 잘 찾아오는 걸 몇 차례 확인하고나니 내성이 생겼는지 불안을 견뎌볼 힘이 생겼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을 적었다. 


셋째, 회식 후 집에 돌아올 때는 가족을 위해 무언가 사올 것


어릴 때 친정아빠는 술을 드신 상태에서도 가족들을 위해 먹을 것을 포장해오곤 했는데 그런 날은 엄마도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지곤 했다. 밖에서 술을 먹으면서도 집에 있는 가족을 생각했다는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나도 남편에게 무엇이든 좋으니 회식이 있는 날이면 빈손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삼겹살집에 가면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포장해오고, 횟집에 가면 회를 포장해오고, 호프집에 가면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이라도 포장해오라고 부탁했다. 술을 마시더라도 한 번씩은 가족을 생각하라는 당부다. 


그리고 어제, 회식으로 양고기를 먹으러 간 남편은 곤란한 듯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 양고기 집인데 포장해갈 만한 메뉴가 없어. 어떡하지?"

"오늘은 할 수 없지. 그냥 와."


12시를 조금 넘겨 집에 도착한 남편. 냉장고를 열고 부스럭부스럭거리고 있다. 늦었는데 얼른 자지 않고 뭐하나 싶어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살펴보니 편의점에서 사 온 초콜릿을 정리하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말은 참 잘 듣는다니까. 아무 일 없이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오히려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남편이 술에 절어 들어오는 회식 날도 생각하기 나름, 내 마음먹기 나름이다. 


남편이 회식을 하면 나도 회식을 하면 된다. 하루쯤 지긋지긋한 밥상 차리기를 관두고 아들과 단 둘이 오붓한 회식자리를 만든다. 하원 길에 피자와 떡볶이를 사 와서 한상 가득 차려 먹고, 제로 콜라와 오렌지주스로 건배를 하며 기분을 낸다. 그런 날은 아들이 원하는 대로 신나게 놀아주고 일찌감치 재울 준비를 마치고 최선을 다해 책을 읽어주며 빨리 재운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기 전 한두 시간 정도 나만의 조용한 밤 시간을 즐기며 내 나름대로의 회식시간을 마무리한다. 남편이 회식을 한다고 술에 취해 들어온다고 굳이 얼굴 붉히며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남편이 회식 후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




*사진출처 :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욕실 반건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