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시간 속 짙어지는 내면의 깊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꿈꿔왔던 삶을 미리 경험하는 데서 오는 안락함이었다는 것을. 미래에 펼쳐질 불안감이 차차 해소됐던 것이 컸다. 삶을 온전히 즐기는 예행연습을 거친 덕분에, 심리적으로도 여유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걸 배우고, 그걸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나를 방해하는 건 식욕 외엔 없었다. 내 의지가 결여된 곳에서 서서히 해방될 준비를 어느 순간 하고 있었다.
빗속에서 마지막 벚나무를 보았다. 비가 내리는 데도 나뭇가지엔 소량의 벚꽃잎들이 꿋꿋이 달려있었다.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발아래로 떨구자 수많은 잎들이 만들어낸 흔적들이 보였다. 올해는 유난히도 벚꽃이 금세 피었다가 생각지 못한 찰나에 져 버렸다. 옅은 분홍빛으로 물든 땅 위에 서 있는 동안, 온통 마음속은 아쉬운 생각으로 물들어만 갔다. 나무 옆에 서서 꽃잎만 한참을 바라본 후에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벚꽃엔딩 그 자체였다.
달력을 보니 4월도 벌써 일주일이 거의 지나갔다. 그리고 벚꽃이 지는 이 시기에 휴직 기간을 3개월 더 연장했다. 석 달이면 너끈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못 보고 지나친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반면 놓쳐버린 관계를 후회 없이 보내고 새로운 관계와 마주하는 데에도 충분했다. 내적 가치에 중점을 두기로 마음먹은 이후, 시간은 허투루 가지 않았다. 또 다른 도전이었으며, 심적인 여유를 되찾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이따금씩 귓가에 노래 가사가 맴돌더라도 집중할 수 있었다. 비록 하루의 8할은 노트북 앞에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뛰어다니는 전략 수집가였다. 그날그날의 일정은 다이어리에 적기만 하면 반 이상은 성공이었다. 이상하리리만큼 하고 싶은 것들이 쌓아졌지만, 실행률은 점차 늘어났다.
처음이었다. 지난 해만 해도 기한 내 못 끝낸 일들이 뒤죽박죽 섞여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날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에 반비례하듯 흥미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현재와는 사뭇 다른 과거의 모습이었다. 반면에 지금은 벅찬 기운이 자꾸만 샘솟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새벽 한 시까지 깨어 있을 정도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잠드는 시간이 점점 늦어질수록 깊어가는 밤에 대한 애착 아닌 애착이 생겨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꿈꿔왔던 삶을 미리 경험하는 데서 오는 안락함이었다는 것을. 미래에 펼쳐질 불안감이 차차 해소됐던 것이 컸다. 삶을 온전히 즐기는 예행연습을 거친 덕분에, 심리적으로도 여유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걸 배우고, 그걸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나를 방해하는 건 식욕 외엔 없었다. 내 의지가 결여된 곳에서 서서히 해방될 준비를 어느 순간 하고 있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는 건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주 5일제'와 같이 사회가 정한 틀에 맞춰 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님을 뜻하기도 했다. 근무 시간이 많을수록 그만큼의 성과가 뒤따라오는 법도 없었다. 지난해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건 효율적이지 못한 근무 여건이었다. 그랬다. 강제 설정된 환경에 맞춰가기 위해 내 몸을 혹사시킨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현재 내부 환경을 설정하며 하고 싶은 일을 실행하는 당사자도 나였다. 몸은 하나였고, 똑같이 의자에 앉아 있지만 그 속에서 얻어가는 가치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동안 좋아하는 꽃이라곤 벚꽃 말곤 딱히 없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보는 시각을 넓혀보니 세상에는 다양한 꽃들이 즐비해있었다. 3월 한창 때는 유채꽃과 수선화를 원 없이 보기도 했다. 벚꽃의 종류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청벚꽃, 겹벚꽃 등 고유의 이름이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했다. 그것들은 4월 중순 이후에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벚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은 길었다. 스스로를 향한 다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돼버렸다. 저기까지 가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앞선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꽃의 종류를 다양하게 알아가면서 나는 생각보다 수선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수선화는 '확장된 세계'의 의미로 다가왔다.
시간과 공간을 늘려가며 또 다른 분야와 접할 수 있는 세계.
그 분야가 무엇이건 간에, 밑바탕에 나를 색칠할 수 있는 건 모두 포함됐다.
나만의 이미지로 채색해 나갈 작업은 한창 중이었다.
이제 남은 세 달 중 두 달이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