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유명했던 광고송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시대가 바뀌었는지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강의를 하던 분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현재 중년의 나이로 살고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에 서툰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참는 것이 당연한 일이였고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 껏 해야하고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으니 말이다.
서운함을 표현한 이후, 그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그녀 또한 새로 시작한 골프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말이 되면 맛집 탐방을 하고 서로의 이야기, 골프 이야기 등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렸고 그녀도 새로운 생활패턴에 적응해 가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구석의 허전함 느낌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날도 특별한 이벤트 없이 지나갈 뻔한 여느 때 같은 날이었다.
골프 모임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가입한 한 동호회에 골프 연습 번개가 올라왔다.
'가보고 싶다....'
한창 골프에 재미가 붙은 그녀는 답답한 실내 연습장이 아닌 바깥에서 공이 날아가는 것이 보고 싶었다.
'내가 친 공은 어떻게 날아갈까? 똑바로 날아 갈까? 어느 정도 멀리 갈까?'
고민하던 그녀는 초보자도 괜찮다면 참석하겠다는 댓글을 남겼다.
어차피 다른 약속도 없었고 그와는 일요일에 만나고 있어서 한가한 토요일이었다.
참석자는 그녀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그녀는 다른 멤버가 없다는 것에 나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래도 한편으로 너무 가보고도 싶었고 이미 간다고 했으니 취소하는 건 예의가 아닐 듯싶기도 했다.
약속 시간에 장소에 도착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습장에 나온 이는 두 살 위의 '찬영'이란 남자였다. 서로 인사를 건네고 함께 연습장에 들어갔다. 처음 가 본 곳이라 그녀는 좀 위축이 되었다. 찬영이는 한 시간만 연습하자며 카드를 내밀었다. 당황한 그녀가 말했다.
"제껀 제가 낼게요. "
"아니에요. 제가 모임을 주도했으니 제가 낼게요. 실은 남자분 한 분이 더 오기로 했는데 아내 눈치 보다가 못 나온다고 연락 왔어요. 하하하"
"아. 네.."
'원래 한 명 더 오는 거였구나. 차라리 그분이 나왔으면 좀 덜 불편했을 텐데...'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일단 연습해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연습장으로 향했다.
"초보시라고 했는데 잘 치시네요." 찬영이 연습장을 나오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ㅎㅎ 다행이네요. 아까 연습비 보내드릴게요. 얼마 나왔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미 내가 냈으니까 동네 가서 날도 덥고 하니까 시원하게 맥주나 한잔 해요. "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네. 그럼 그건 제가 살게요."
알고 보니 그는 그녀의 옆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만날 장소를 정하고 각자 차로 돌아갔다. 집에 주차를 마친 그녀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프로필 보니까 희수가 나보다 어리던데 말 편하게 할게~"
"네. 그러세요."
"술 잘 마셔?"
"전엔 좀 즐겼는데 요즘은 잘 안 마셔요."
찬영이가 말을 이어간다.
"난 회사 일 끝나면 꼭 한잔씩 하는 것 같아. 어제도 내가 안주 만들어서 막걸리 한잔 했지. ㅎㅎㅎ"
"혼자 오래 사셨나 봐요. 직접 요리도 하고"
"독립해서 산지 좀 됐어. 희수는 돌싱? 싱글?"
"전 돌싱이요." 그녀는 자신이 이혼한 사실에 대해 감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빠는 결혼 안 했었나 봐요?"
"응, 동생은 먼저 결혼했는데 나만 안 가서 부모님이 걱정이 크지. 하하하"
"저도 동생이 먼저 결혼했었는데 내가 여자라 그런지 큰 부담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지금 만나는 사람은 있어?"
그녀는 왠지 이런 질문이 나올 것 같았었다.
"네. 만나는 사람 있어요."
"오.. 이혼 한지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빨리 만났네."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인연이 또 그리되더라고요."
"왜 이혼했었는지 물어봐도 돼?"
"네. 뭐 상관없어요."
그녀는 지난 이야기를 간략히 이야기했다. 찬영이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지난 이야기와 골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어 시간이 흘렀다.
"이제 문 닫을 시간이 돼가는 것 같아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러자. 오늘 반가웠고 다음에 연습장 가고 싶으면 연락해. 또 같이 가자. "
"네. 기회 되면 그렇게 해요."
극구 괜찮다는 그녀의 거절에도 찬영이는 집도 가까운데 하며 그녀를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날, 여느 때처럼 그녀는 그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자주 가던 고깃집으로 향했다.
고기를 구우며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가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야외 연습장을 간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 고민도 살짝 했었지만 숨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나 어제 동호회 사람이랑 야외 연습장 갔었어. 공이 날아가는 게 보이니까 재밌었어. 같이 갔던 분이 나한테 잘 친데. "
"어디로 갔었어?" 그가 물었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습장이 있더라고. 시설이 나쁘진 않았어."
"시간당 얼마였는데?"
"아, 같이 가신 분이 연습비를 내줘서 못 봤어."
살짝 놀란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곤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대신 내줬다고?"
"응. 내가 낸다고 했는데도 자기가 낸다고 하길래. 얻어 먹는건 아닌 것 같아서 대신에 내가 치맥 샀어."
그녀는 이 말이 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깊게 생각지 못했다.
"아. 그랬구나..."
그렇게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소화시키자며 산책길을 나섰다.
이후, 그 말로 인해 그들 사이에 어떤 변화가 밀어닥치게 될지 그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그의 손을 맞잡고 재잘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