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년 운이 안좋다는 게
결국 부모 복이 없다는 뜻이거든?
너는 초년이 제일 힘들어.
신기하게도 점쟁이들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니 밥그릇 니가 찾아가는 팔자여,"
"부모가 좀 더 뒷바라지를 해줬으면은
글 깨나 쓰면서 살 사주인디..."
부모랑 연이 없다...라...
아빠가 돌아가신 게
내 나이 스물 넷.
스물 여섯이 되던 해에
서둘러 결혼을 했고,
두 남동생 뒷바라지에
있는 등골, 없는 등골
다 빼주고 있던 즈음이라
꽤나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친척들과
엄마의 친구들은
내 손을 잡고
네 엄마 잘 챙겨야 한다.
하며, 신신당부를 했다.
고작 스물 넷이었던 나는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꾸역꾸역 대본을 쓰면서
눈물을 삼켜야 했고,
납골당에 아빠를 안치하고
돌아온 밤, 당시 남자친구(현 남편)의
차를 타고 납골당을 찾아
마음껏 울었다.
내 마음처럼,
그날 밤에도 비가 내렸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늦둥이 막내 딸이었던
엄마를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나만 보면
엄마한테 잘해야 헌다.
그 말 뿐이었다.
내가 아기를 낳아야 하는 이유도
엄마가 사돈 눈치가
보이기 때문일거라고 했다.
돌아보면 외할머니도
우리엄마의 친정엄마였으니
나보다 본인 딸이
더 안쓰러웠던 것이다.
친정엄마가 되어보니
이 세상 모든
친정엄마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식장을 찾아온 엄마의 친구들은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하니...
엄마한테 자주 찾아와야 한다.
하며 눈물을 찍어냈다.
아니, 내가 뭐 외국으로 시집가냐고?
다들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결혼식 내내 울었다.
건질 사진이 하나도 없을 만큼.
모르겠다. 왜 울었는지는...
그 후로 10년,
나는 엄마를 도와
가장노릇을 했다.
(남편에게 각별한 감사를 표한다.)
봤지?
당신들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나는 그저 그런 딸이
아니에요, 이 사람들아.
나는 우리 엄마의
유일한 자랑이었다.
남편 대신이었고,
든든한 손가락이었다.
두 동생들이 자립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니,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 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마음에
돌 하나가
쑥 빠진 기분이랄까.
이날이 오긴 하는군.
특히,
취업준비 중에 사고를 당해
방황이 길었던
둘째 동생이 마음을 잡고
오랜 연인과 결혼을 하던 날.
엄마와 나는 서로를 마주보며
노부부처럼 웃었다.
엄마, 이제
세제 같은 건 엄마가 쿠팡으로 시키고
폰뱅킹, 키오스크,
이런 거 배워서
엄마 인생 스스로 살아.
나도 곧 출산인데
이제 내새끼들 키워야 돼.
엄마도 알지?
내가 얘네 어떻게 가졌는지...
난 내 딸들, 정말 잘 키울거야.
출산을 앞두고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앞으로의 꽃길을 상상하는 나에게
엄마는
꽃게탕을 바글바글
끓여 내어주며
그래, 그럴게.
했다.
그로부터 반년 뒤,
각자 잘 살자,는 약속을
먼저 깬 쪽은
.
.
.
.
.
.
당연하게도,
나였다.